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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에서 썰매를!

우리의 돌로미티1

by 장미화


돌로미티에 들어서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로라하는 유적과 건축들에 너무 둘러싸여 있었나 보다. 대자연을 마주하니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유구한 역사와 예술에겐 미안하지만, 단순한 자연이 주는 기쁨이 참 크구나 싶다. 설명할 것도, 들을 것도 없이 그저 바라보고 느끼면 되니까.



애초에 돌로미티를 선택한 이유를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난다. 다름 아닌 ‘썰매’ 때문이다. 재작년부터 이스탄불에 살면서 우리 가족은 눈을 못 봤다. 특히 작년 겨울은 정말 포근해서 눈이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썰매를 너무 타고 싶어 하기에 약속했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 중에 꼭 썰매를 타게 해 주겠노라고! 알프스는 사계절 눈 덮인 곳이 아닌가.


지금 돌로미티에 가면 분명 눈이 많을 거야.


그러니 너희가 준비할 것은 설렘 가득한 엉덩이와 썰매 뿐이라고 말이다.




세체다에 도착한 나는 당황했다. 겨울의 세체다는 경치를 구경하러 가는 곳이 아닌가 보다. 그곳은 그냥 ‘스키장’이었다. 우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키복으로 풀 착장을 하고 있었다. 썰매를 태울 생각으로 아이들은 장화에 장갑으로 무장시키긴 했지만, 추리닝 차림이었던 나는 살짝 민망해졌다. 전 세계에서 스키를 즐기러 온 마니아들 사이에서 머쓱했다. 그들 사이에 선 내가 '옥에 티' 같은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속삭였다.


"썰매 타는 사람은 한 명도 없네.."


아뿔싸, 실수했다. 내 말을 들은 막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한다.


나 썰매 안 탈래.


나는 서둘러 경솔했던 말을 주워 담았다.


"어? 저기 썰매 갖고 가는 사람 본 것 같아! 여기까지 왔는데 타자~~ 아주 재밌을 거야."


"아니야. 썰매 갖고 가는 사람 한 명도 없어.

나는 안 탈 거야."


그러자 첫째가 말했다.


뭔 상관이야? 난 탈 거야!
당연히 타야지.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랐다. 썰매고 뭐고 세체다의 풍경은 말 그대로 경이로웠다. 그때 첫째가 썰매를 들고 기세등등하게 언덕을 올라갔다. 그리고는 썰매를 깔고 신나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스키 사이를 뚫고 돌진하는 썰매! 타인 의식할 것 없이 하고 싶은 걸 맘껏 즐기는 첫째 아들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형의 모습을 본 막내가 외쳤다.


그냥 나도 탈래!!


그때부터 형제는 지치지도 않고 썰매를 탔다. 알프스가 만들어준 자연 썰매장에서, 무려 3시간 동안이나! 썰매가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세체다는 길어야 1시간 코스였을 거다. 한번 쓱 둘러보고 사진 찍고, 남편과 내가 맥주 한 잔을 다 비우기도 전에 아이들이 ‘언제 가~~??’ 하며 재촉할 평범한 여행 코스. 그러나 야심 차게 준비해 간 썰매 덕에 우리는 믿을 수 없이 여유롭게 세체다를 즐겼다. 3시간 동안 온전히 그 절경을 가슴에 담았다.


훗날 내가 친구에게 돌로미티 여행 이야길 하니 그가 말했다.


"아~~ 그러니까 스키장 한가운데서

썰매를 탔다는 거네?"


그 말을 들으니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한 거일 수도 있다는 자각이 살짝 들었다.


".. 맞아. 바로 그거야."


"미쳤네. 그래도 되는 거야?"


친구의 말을 듣고 멈칫, 그때를 떠올렸다.


어, 그래도 되더라.


세체다에서 스키를 타는 모두가 프로급 선수들이라 알아서 썰매를 슝슝 피해 갔다. 더구나 우리 아이들이 썰매를 어찌나 신나게 타는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기도 한 번 타 봐도 되냐며 썰매를 빌려가기도 했다.


원 없이 썰매를 즐기고 케이블카에 탑승한 첫째가 말했다.


"나도 다음에 여기 올 땐 스키를 한번 타볼까 봐. 저것도 꽤 재밌어 보여."


아이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부모들이 내 아이에게 그림을 가르치고, 피아노나 플루트를 가르치고, 글쓰기를 가르치고, 무용을 가르치는 것. 대단한 예술가가 되기를 바라서겠는가. 심지어 돈 벌어먹기 힘들다고 예술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그런 것들을 가르치는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아이가 인생에서 더 많은 것들을 영위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이번에 대자연에서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며 아이가 느낀 것도 어쩌면 이 연장선상에 있었다. 아이는 어른인 나처럼 머쓱해하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저 사람이 특별히 멋진 장비를 가지고 근사하게 즐긴다고 생각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눈밭을 저렇게 즐기는 사람도 있으며 다음에는 저렇게도 한번 즐겨보고 싶다는 마음.

나는 오늘 이 엉덩이만 한 눈썰매로 세체다를 정복했으니 다음엔 저 스키로도 정복해 보리라 하는 결의다.

다양한 방식으로 놀고자 하는 그 열정이 굉장히 멋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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