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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화장실 보단 착한 이탈리아인의 법

우리의 위기2

by 장미화


우리 가족을 공포에 떨게 하는 막내의 말이 있다.

그건 바로,


엄마, 거기 화장실 있지?


이를테면


"엄마, 우리 지금 가는 데가 어디라고?"

"트레비 분수."

"거기 화장실 있어?"


"엄마, 우리 지금 콜로세움 가는거지?"

"응."

"거기 화장실 있지?"


급하냐고 물어보면 꼭 이렇게 답한다.


아니, 그렇게 급한 건 아닌데
조금 급하긴 해.


급하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파악할 수 없는 저 말이 떨어지고 5분이 채 지나기 전에 돌연 비상사태가 찾아온다. 그렇게 급한 건 아니었는데 응급상황은 어찌 이렇게 빨리 찾아오는 걸까. 일단 많이 급해지면 막내는 울기 시작한다.


신기한 건 화장실이 있는 곳에서는 오줌이 마렵지 않다는 사실이다. 꼭 화장실이 없는 곳에서 화장실을 찾는다. 그래서 이제 우리 가족은 화장실이 있는 곳을 떠날 땐 무조건 네 명 다 화장실에 들른다. 그래도 막내의 화장실 찾기는 여전하다.


막내의 '화장실 질문'이 떨어지면 우리는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 마냥 화장실 사냥에 나선다. 보통은 커다란 스타벅스 같은 곳을 노리는데 이탈리아에는 그 흔한 스타벅스가 보이질 않는다.


여차하면 바지 하나 사입히면 되지 싶다가도 막내는 이른바 '가오'를 중시하는 타입이다.


큰 아들이 화장실에 휴지가 없어서 똥 안 닦고 나온 걸 친구들에게 굳이 이야기하는 타입이라면(이것도 문제는 있어보인다..), 막내는 넘어져 다쳐도 울지 않는다. 한 번은 옆을 보고 뛰다가 가로수를 머리로 그대로 들이받은 적이 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앞만 보고 계속 걸어간다. 새해 첫날 제야의 종소리 같은 묵직한 소리가 들렸는데도 말이다. 놀란 내가 급히 따라가며 괜찮냐고 물었더니 터프하게 말한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눈두덩이 시뻘게져있는데도 앞만 보고 걸어간다. 그런 막내가 바지에 오줌을 싼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날도 길을 걷다가 느닷없이 시작됐다.

“엄마…"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여기 화장실 있나?"


나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로 받아친다.

“급해?”


“아니, 그렇게 급한 건 아닌데, 조금 급하긴 해.”


아이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아는데도 화가 난다.

“너는 화장실 있을 때 좀 가면 안 되겠니?”


“아까 숙소에서 나올 때도 갔다 왔어. 그런데 또 마려운 걸 어떡해!”


하필이면 오줌을 받을 빈 병도 없고 길 한 복판인 데다 가볍게 들어갈 만한 카페도 보이질 않는다.


두리번거리던 첫째가 외친다.

“아, 저 앞에 화장실 표시 나왔다!”


“그런데 알다시피 저런 화장실은 유료 화장실이야.”


남편은 서둘러 현금인출기를 찾아 달려갔고 우리는 화장실 줄 앞에 서서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줄 옆으로 나와 어정쩡하게 서 있으니 프랑스어로 떠들던 여자 두 명이 뒤로 가라는 손짓을 하며 눈치를 준다. 누가 그걸 모르나? 다급한 아이의 표정을 보고도 그러는 건 좀 야속하다. 옆을 보니 막내는 이제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다. 남편은 현금인출기를 못 찾은 건지 올 생각을 안 한다. 언제까지 기다릴 순 없다. 나는 결심했다. 돈 받는 아저씨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짧은 영어로 말했다.


디스 이즈 이멀전시

(지금 응급상황이에요.)


남편이 돈을 뽑으러 갔는데 금방 올 거라고, 그때 돈을 낼 수 있다고 더듬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다 듣지도 않은 아저씨는 말없이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화장실 안까지 데려다준 아저씨는 내게 눈을 찡긋했다. 물론 눈물을 흘리는 아이를 보면 누구라도 그 아저씨처럼 행동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탈리아 여행하며 화장실 급한 아이가 한 둘이랴 생각하면, 아닐 수도 있겠다 싶다. 별 것 아닐 수 있는 그 선의가 그렇게 고마웠다. 볼 일을 해결하고 나온 아이의 표정은 로또 1등이라도 당첨된 사람 같다. 아저씨는 나오는 아이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아이와 화장실 앞에서 몇 분 서 있으니 남편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아저씨에게 돈을 내겠다고 했으나 손사래를 치며 가라고 한다.


여행을 할 때 그 나라의 인상을 상당 부분 결정짓는 건 ‘사람’이다. 나는 프라하에 대한 기억이 참 좋은데, 내 친구는 ‘체코 사람들이 무뚝뚝해서 다시 안 가고 싶어’라고 한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터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음악과 드라마, 문화를 너무 사랑한다며 한국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진지하게 묻는다.


"한국 사람들은 어때요? 굿, 아니면 배드??"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한국인인 나한테 묻는 거야?

당연히 굿이지!!

한국인은 다 굿 피플들이야."


한국에 돌아가면 외국인에게도 잘해주고 싶다. 잘 모르고 어리바리한 사람에게 친절하고 싶다. 어느 나라 사람이건 상관없이.


막내가 바지에 실례할 뻔한 대참사를 막아준 아저씨, 지하철에서 미아가 된 아이들을 지켜준 사람들,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 같을 때 도와주고 싶어 끼어드는 오지랖. 그런 오지랖이 난 좋다.


착한 이탈리아인 덕분에 유료화장실에도 좋은 추억이 생겼다.

그러나 중요한 건 우리나라는 아예 화장실 가는데 돈을 안 받는다는 사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는 화장실! 그건 정말이지 좋은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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