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다음 생에 개미로 태어난다!
줄지어 가는 개미들을 발로 밟는 아이에게 말했다. 참 착하고 순한 아이인데 개미를 왜 밟아 죽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 책에서 보니 아이들이 곤충을 괴롭히는 행위를 어른 눈높이의 잔인함으로 볼 필요는 없단다.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생물에 호기심이 많기에 그럴 수 있다. 소심한 아이의 경우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거나, 반대로 주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처치함으로써 우월감을 느낄 수도 있다고 한다. 이때 지나치게 반응하며 아이에게 겁을 주기보단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도록 차근히 설명해 주는 것이 좋단다. 그러나 아이의 잔인성이 보기 언짢았던 난
'너 그런 나쁜 행동 하면 사람으로 다시 못 태어난다'는 얘기로 곧잘 겁을 줬다.
어느 날, 고양이를 열심히 쓰다듬어 주던 아이가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너, 나쁜 짓 많이 했지?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왜? 고양이가 뭐 잘못했어?"
아이가 대답했다.
"나쁜 일 많이 했으니까 사람으로 못 태어나고
이렇게 고양이로 다시 태어난 거 아니야?"
아이의 그 말은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고양이로 태어난 게 나쁜 건가? 우습게도 '사람으로 태어난 것보다 나은 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아이에게 물었다.
“네가 보기엔 고양이 인생이 나빠 보여?”
“아니~ 너무 좋지. 아무것도 안하고 맨날 놀기만 하잖아. 아… 나도 다음엔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
“엄마가 보기엔 너도 맨날 노는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놀다니! 학교에서 맨날 노는 줄 알어? 그리고 문제집 1장씩 풀잖아!!”
나는 순간
“야!!! 네 친구들 중에 하루에 문제집 달랑 1장 푸는 애 있으면 나와보라 그래!!!!” 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의 소리를 꾸욱 꾹 눌러 담고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네.
고양이 인생도 나쁘진 않은 것 같다. 그치?”
“응. 내 인생보다 훨씬 나아!!"
“그럼 라피는 나쁜 짓을 많이 한 게 아니라, 착한 일을 많이 해서 고양이로 태어난 거네.”
‘라피’는 우리 집 고양이 이름이다. 그렇다. 고양이 천국인 이곳 이스탄불에서, 우리 가족은 결국 고양이를 입양했다. 이스탄불에선 기본적으로 길고양이가 집고양이만큼 여유롭게 살지만, 물론 데려다 키우는 사람도 많다. 새끼고양이나 이런저런 사정이 생겨 키우지 못하게 된 고양이는 인터넷 사이트에 올려 입양을 보내주기도 한다. 우리도 인터넷에서 고양이의 사진을 보고 입양을 결정했다. 노란색 털의 '치즈 냥'이었다. 길고양이를 데려와 주사도 맞히고 키우고 있는데, 먼저 키우던 고양이의 텃세가 심해 더 이상 키울 수가 없다고 했다.
맨 처음 데리고 왔을 때 비쩍 마른 몸에 노르스름한 털, 그리고 목이 길어 꼭 기린 같았다. 아이들이 “우리 얘를 ‘기린이’라고 부르자!” 했다. 그럼 터키 고양이니까 터키어로 불러주는 게 어떨까 하여 ‘기린’의 터키어인 ‘쥬라파Zürafa’가 되었다. 그런데 ‘쥬라파’를 매일 부르다 보니 어느새 줄여서 ‘라퐈~’가 되었고 지금은 애칭처럼 ‘라피~’ 가 되었다.
결혼하기 전 친정에선 강아지를 키웠다. 강아지는 갖은 애교를 부리고 귀여운 짓을 한다. 옆에 와서 치대고 늘 나의 사랑을 갈구한다. 그런데 덜컥 고양이를 키워보니, 이건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고양이는 배변 교육이 필요 없고 깨끗해서 강아지보다 기르기 쉽다고만 들었다. 하지만 집사 자질 없는 사람 기준, 고양이와 산다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일단 소파, 침대, 가방 할 것 없이 집안의 가죽이란 가죽은 다 아작을 내놨다. 캣타워, 스크래처, 장난감도 많이 사줬는데 소용없다. 사람이 그랬으면 다리몽둥이가 성치 못했을 것이다.
늘어지게 잘 때 귀여워서 쓰다듬으면 귀찮은지 저어기 멀리로 가서 다시 우아하게 자리 잡고 눕는다. 견주였던 나는 그 모습이 아주 낯설고 얄밉기까지 하다. “이게 아주 그냥, 주인이 귀찮냐?” 그나마 애교라곤 눈을 게슴츠레 뜨고 탱크 지나가는 소리로 괄괄 대는 게 다다.
그중에서도 정말 적응이 안 되는 것이 있다. 뜬금없이 위의 '탱크 괄괄'소리를 내며 다가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한다. 신통해서 쓰다듬어주면 한참을 그릉대다가 느닷없이 싸대기를 때리며 가버리는 것이다.
"야!! 내가 뭐 잘못했어?? 어이가 없네!!!”
씩씩대다 보면 나만 바보가 된 기분이다. 고양이에게 하지 말라는 것을 안 할 학습 의지는 결단코 없어 보인다.
작년 가을, 이스탄불에 놀러 온 울엄마는 라피를 보며 말했다. 고양이는 강아지와 달라, 혹시라도 할퀼까 겁난다면서 가만히 가만히 쓰다듬으면서.
"이 집에 사는 애들은 다 착하다.
우리 딸도, 김서방도, 손자들도.
양순이까지..."
엄마는 고양이 이름이 '라피'라고 아무리 말해줘도 무조건 '양순이'라고 불렀다.
"엄마, 양순이는 안 착하지 않아?
난 고양이 과는 아닌가 봐."
"양순이 착하지, 왜 안 착해.
얘는 막내가 불편하게 안아도 몸을 축ㅡ 늘어뜨리고
나 죽었수ㅡ 하고 있더라야.
그게 착한 거지."
아, 왜 사람들은 고양이에게 기대란걸 안 할까. 어찌 할퀴지만 않아도 착하다는 소리를 들을까. 아이가 여덟 살 자기 인생보다 고양이 인생이 훨씬 낫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
심지어 그 양순이가 오늘은 큼큼 대며 장미꽃 향기를 맡는다. 여유 있네. 목숨 걸고 착한 일 해야지만 다음 생 고양이로 태어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