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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축구 Feb 14. 2024

그랜드 캐년 모험기 1편.

High risk High return

라스베가스에 가면 꼭 '그랜드 캐년'을 가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랜드 캐년'이라는 지명은 유명세 덕에 예전부터 익히 들어왔지만 라스베가스와 가까운 줄은 몰랐다. 차로 4~6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고 1 day 투어 프로그램도 다양하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갈 수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난 왠지 그런 편하고 쉬운 '관광'은 하기 싫었다. 예전부터 로드트립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오토바이나 차를 끌고 끝없는 지평선을 달리는 그런 로망 말이다. 대학시절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같은 영화를 보며 언젠간 나도 꼭 '체 게바라'처럼 사막과 지평선을 달리리라 생각했었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한 장면. 로드트립에 대한 로망을 심어준 영화다.

이런 이유로 나는 차를 렌트해 직접 운전하여 그랜드 캐년을 다녀오리라 생각했다. 핸드폰 검색을 통해 렌터카 업체에서 가장 싼 차를 찾았다. 100달러 남짓한 돈으로 SUV기종을 렌트할 수 있었다. 앱으로 예약할 때는 어떤 기종의 차인지 정보가 없었고 단순히 SUV라는 것만 표시되어 있었다. 어차피 하루 탈 차량이니 잘 달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큰 기대가 없었다. 업체를 찾아가 서류를 작성하고 주차장에 있는 차를 안내받았는데, 웬걸.

내 드림카 중 하나였던 지프의 '랭글러 루비콘'

내 드림카 중 하나였던 '루비콘'이 눈앞에 등장했다. 우락부락하면서도 어딘가 섬세하게 생긴 루비콘과 끝없는 사막을 달릴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났다. 차를 빌려 새로운 숙소로 짐을 옮긴 후, 차로 30분 정도 거리인 비교적 가까운 '후버댐'까지 갔다 와 보기로 했다. 미국에서의 운전이 처음이었지만, 금방 익숙해졌다. 한국과 다른 것이라면, 빨리 달리는 트럭이 엄청 많다는 것 정도였다.

'후버댐' 때문에 라스베가스라는 도시가 생겼다.

이렇게 짧은 외출을 마치고, 내일 운전하며 차에서 마실 물, 콜라, 육포를 대충 사서 실어 놓고 이른 저녁에 잠에 들었다. 내일 아침 일찍 '그랜드 캐년'으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별다른 계획은 따로 없었다. 나의 계획은 총 3단계였는데, 


1. 아침 일찍 일어난다. 

2. 그랜드캐년으로 향한다. 

3. 무사히 돌아온다.


가끔 내가 했던 행동들을 돌아보면 정말 지나치게 계획이 없고 무모할 때가 있는데, 항상 그 당시에는 스스로 잘 인지하지 못한다. 분명 그런 행동을 경계하는데도 말이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잠에서 깬 시간은 새벽 2시 40분 정도였다. '1번 아침 일찍 일어난다.' 퀘스트를 완료했으니 이제 그랜드 캐년으로 향하면 된다. 구글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니 4시간 20분 정도의 예상시간이 찍혔다. '뭐 가깝네?'라는 가벼운 생각과 함께 아주 천천히 가도 6시간이면 아주 여유 있게 도착할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일정을 하나 더 추가했다. 그랜드캐년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다 알게 된 '엔텔로프 캐년'이라는 곳이었다. 그랜드 캐년에서 2시간 정도 더 가야 하는 곳이었는데 구글 사진을 보니 윈도우 배경화면에서나 봄직한 비현실적인 계곡이었다. 이곳은 따로 투어를 예약해야 한다고 해서 13시로 투어예약을 했다. 내 생각은 이랬다. 


3시 반, 4시 정도에 출발하면 적어도 9시 반 정도엔 도착하겠지? 그럼 1시간 반정도 그랜드캐년 돌아보고 11시에 엔틸로프 캐년을 보고 오면 되겠네?

당시엔 가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크게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는데 미국은 넓고 넓고 또 넓다는 것이었다. 거리는 마일로 표시되니 감이 없었고 대충 시간만 보고 운전을 얕잡아 본 것이다. 실제로 운전해 보고 깨달은 것인데 구글에 표시된 '4시간 20분'은 130km 정도의 속도로 좌회전 우회전 거의 없는 직선 도로를 쉬지 않고 달렸을 때 걸리는 소요시간이었다.


동이 트기도 전에 출발한 나의 모험은 순조로웠다. 거의 직진뿐인 운전이라 출발하고 나서 한 2시간 까지는 아주 신나게 달렸다. 하지만 동이 트고 비슷한 풍경이 이어지자 이내 지겨워지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고통이 시작됐다.


난 한국에서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더라도 지하철보다 버스를 선호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버스는 창밖이 지겹지 않게 계속 바뀐다는 점과 지겨운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때문이다. 이렇게 지겨운 것을 극도로 꺼리는 나에게 생소하면서 아름다웠던 지평선도 2시간이 넘어가자 '지겨움'이라는 고통으로 찾아왔다.

 


동 트기전 출발해 계속해서 달렸다. 아주 지겨웠다.

주유소가 나타날 때마다 기름을 채워 넣었다. 언제 또 주유소가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계속해서 직진만 하다 보니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는 '행위'마저도 반가웠다. 심지어 좌회전이나 우회전할 일이 있다면 그마저도 반가웠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크게 쉰 시간도 없었는데 대략 7시간 정도 걸려 11시쯤 그랜드캐년 근처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랜드캐년으로 들어간다면 13시에 투어를 예약해 놓은 '엔텔로프 캐년'에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랜드 캐년에 거의 도착한 차를 과감하게 돌려 엔텔로프 캐년으로 먼저 향하기로 했다. 내 판단은 정확했고 13시가 다 되어서야 엔텔로프 캐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의 다 도착해서 알게 된 사실은 엔텔로프캐년도 'upper' 구역과 'lower'구역이 따로 있어 운이 안 좋았다면 나는 헛걸음할 뻔했다는 거다. 다행히 내가 도착한 곳도, 예약한 곳도 'lower'구역이었다. 장시간 운전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도착했지만, 계곡투어가 시작되자 나는 '그래도 오길 잘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랜시간 자연이 만들어낸 비현실 적 공간이었다.

투어를 마치고 시간을 보니 14시였다. 이제 라스베가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그랜드 캐년을 둘러보고 돌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구글에서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을 검색했는데, 오픈 시간이 16시까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서둘러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니 소요시간이 2시간 15분이었다. 2시간 후 면 입장할 수 없다니?! 서두르면 가능하겠다 싶어 얼른 차에 올라타 엑셀을 더욱 세게 밟았다. 중간에 살짝 오줌이 마려워질 때쯤, 주유소가 나타났다. 하지만 여기서 기름을 넣고 화장실을 갔다가 시간을 지체한다면 그랜드캐년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았다. 언뜻 보니 남아있는 기름으로 갈 수 있는 거리와 네비에 나와있는 거리가 엇비슷하다. 나는 과감하게 그 주유소를 그냥 지나쳐 엑셀을 더 세게 밟았다. 


엔텔로프 캐년에서 그랜드 캐년 가는 길엔 차 한 대 구경하기도 쉽지 않았다. 점점 숲으로 들어가는 것 같긴 한데 내비게이션에 나와있는 거리는 생각보다 줄어들지 않고 기름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3시 30분 정도 되었을 때, 위기감이 엄습했다. 기름 경고등이 뜬 것이다. 한국이야 어디든 웬만해선 보험을 부르면 되지만 만약 여기에 고립된다면 최소 하룻밤은 혼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고심 끝에 그랜드 캐년을 포기하고 주변 주유소를 네비에 찍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에 주유소를 검색하는 순간, 데이터가 끊겨 버렸다. 데이터가 안 터지는 지역에 돌입한 것이다. 그러면서 자동적으로 그랜드 캐년을 향했던 내비게이션도 꺼져 버렸다.


선택지가 없었다. 아까 봤던 그랜드캐년으로 향하는 내비게이션 기억을 곱씹어 그랜드캐년으로 향하기로 했다. 기름이 떨어지면 안 됐기에 브레이크를 잡지 않고 60킬로 정도로 운행하기 시작했다. 오줌보는 터질 것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멈췄다 다시 움직일 기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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