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과 아날로그
80년대 후반생인 나는 '디지털 세대'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디지털'은 "새로운" "최신의"와 같은 말로 받아들여졌고 '아날로그'라는 단어는 디지털의 반대말처럼 사용되었다. '낡은' '구시대적인'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다. 맥락상 이렇게 해석되기도 하지만 경험에서 오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같은 기록이라도 노트에 펜으로 적으면 아날로그, 노트북에 타이핑을 한다면 디지털이다.
같은 풍경이라도 붓으로 그린 수채화는 아날로그, 카메라로 찍으면 디지털이다.
같은 음악이라도 악기로 직접 연주하면 아날로그, 음원을 스피커로 재생하면 디지털이다.
이렇듯 겉으로 보기엔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구분이 쉬워 보인다. 하지만 진짜 구분이 된 것일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한다
"손에 쥘 수 있으면 아날로그, 그렇지 않다면 디지털"
뭔가 딱 들어맞는 것 같지만 이 말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한 속성일 뿐, 구분점이 될 수 없다. 손에 쥘 수 없는 우리의 목소리도 아날로그이고 우리가 쥐고 사는 아이폰도 디지털이기 때문이다.
디지털은 0과 1로 표현된다. 있다/없다 의 개념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 0과 1로만 모든 것을 표현한다. '있다' '없다'의 개념이 전부다. '있다 없었다' 거나 '0과 1 사이 그 중간 어디쯤' 같은 애매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날로그에는 0과 1 사이에 무수히 많은 지점이 존재한다. 0과 1 사이에는 중간지점인 0.5 말고도 무한대의 지점이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아날로그는 연결 없이 이어지지 않는다.
디지털은 0과 1(있다/없다)을 이용해 데이터를 저장하고 이미지를 표현하며 음악을 재생한다. 그 사이 물리적 연결은 존재하지 않거나 희미하다. 반대로 아날로그는 연결되어 있다. 타자기로 종이에 글자를 직접 찍어내고 필름 위로 빛이 스며들어 상이 맺히며, 레코드판에 홈을 파내어 기록한다.
결국 아날로그는 역설적으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유한하다. 그 연속성을 담아내는 그릇이 결국 물리적이기 때문이다. 필름 카메라는 한 롤에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정해져 있고, 레코드판은 한 면에 약 20분의 음악만 담을 수 있다. 이 ‘물리적 제약’이 아날로그를 유한한 세계로 만든다.
반대로 디지털은 저장과 복사가 자유롭다. 연결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메모리카드나 하드디스크의 용량이 크지 않아도, 데이터를 삭제하고 덮어쓰고 또 무한히 복제할 수 있다. 스마트폰 사진은 수천 장을 찍어도 필름처럼 ‘다 썼다’는 순간이 없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기록 방식이 디지털을 무한해 보이게 만든다. 물론 실제로는 디지털도 물리적 저장 한계가 있지만, 우리에게 주는 감각은 ‘무한’에 가깝다.
이렇게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확실한 차이가 존재한다. 2025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것이 디지털이다. 지금 내가 이 기록을 하는 온라인 '브런치'도 당신 눈에는 글로 보이겠지만 종이책에 쓰여있는 활자와 다르게 결국 0과 1이 만들어낸 데이터 기록을 0과 1이 만들어낸 모니터 또는 핸드폰의 한 광원일 뿐이다.
우리의 인생은 아날로그다. 우리의 인생은 연속적이고 연결되어 있으며 '유한'하다.
"지금의 '나'는 과거 '나'들의 총합"
2025년 8월 15일 함평에 있는 기본학교로 가고 있는 이축구는 어디선가 뚝떨어진 내가 아니다. 내가 지금 존재하는 이유는 과거의 '나'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너무나 아날로그적이다. 갑자기 함평으로 가고 있는 '나'가 아니라, 과거 기본학교 3기 졸업생인 이축구이기 때문에 함평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들이 이어져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다. 그건 디지털의 "있다/없다"가 아니라 아날로그의 '끊임없는 연결'에 가깝다.
그렇기에 우리는 아이폰 카메라 쓰듯 인생을 대해서는 안된다. 필름 사진처럼, 한 장 한 장이 한정되어 있기에 매 순간이 소중하다. 디지털은 지우고 다시 찍을 수 있지만, 인생은 필름처럼 한 번뿐이다. 다시 녹화할 수 없고, 다시 연주할 수 없으며, 다시 쓸 수 없는 페이지가 바로 오늘이다.
이 인생의 유한함과 연속성을 깨닫는 순간,
그제서야 "바로 지금"을 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