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푸른 초원 위의 집
어릴 적 내 이름은 삼삼이. 2대 독자였던 아버지가 서른세 살에 첫아들을 보았다고 삼삼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집에서도, 동네에서도 그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기 때문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내 진짜 이름은 삼삼이 인 줄로만 알았다.
그 이름과 함께 짝을 이뤄 항상 나를 따라다니던 노래가 하나 있었는데 어른들은 나만 보면 "삼삼아, 저 푸른 초원 위에 한번 불러도" 졸라대던 생각이 난다. 혹 다른 노래라도 부를라치면 "아니, 그거 말고 남진 노래 있잖아" 라며 고개를 저었다. 왜 사람들은 내게 이 노래만 원하는 걸까?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우리 집은 어머니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어찌어찌 시작한 것이 집장사인데 임산부가 현장 사람들과 함께 집을 짓고 팔러 다니기에는 거친 일이었을 것이다. 대여섯 살 무렵, 동생들이 줄줄이 태어나면서 나는 친척집으로 몇 달씩 돌아가며 맡겨지곤 했다.
어느 날 밤, 엄마 손을 놓고 외가 친척 손에 이끌려 그 집 대문으로 들어서려는데 전봇대 뒤에 숨어 나를 지켜보던 엄마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때까지 새로 받은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 엄마가 곁에 있는지 없는지도 눈치채지 못하다, 멀리서 글썽이는 눈과 마주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엉엉 울었던 것이 내가 기억하는 엄마와의 첫 이별 장면이다.
외갓집 어른들은 그런 나를 얼르고 달래서 분위기를 바꾸려 노래 한곡을 시켰는데 그 역시 '저 푸른 초원 위에'였다. 하지만 엄마가 날 버리고 갔다는 불안과 걱정으로 아무리 외삼촌이 바람을 잡고, 이모들이 먼저 불러주어도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누군가 "삼삼아, 니 옛날엔 이 노래 잘 부르고 춤도 잘 추어주었는데 생각 안 나?" 아쉬운 듯 말했지만 토라진 마음은 변함이 없다.
내가 언제부터 이 노래를 불렀는지 그리고 어쩌다가 나의 지정곡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주변 어른들만 추억하고 정작 불렀던 당사자만 모르고 지내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고 최근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내 말로는 부엌에서 명절 준비로 한창인 중에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흘러나오자 어머니는 잠시 손을 멈추고는 옛날이야기하듯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날도 공사 현장에서 지쳐있던 당신 앞에서 갓 네 살 된 삼삼이가 갑자기 쌓아놓은 벽돌 위로 올라가더니 "엄마 울지 마, 내가 노래 불러줄게" 라며 한창 유행 중인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집 짓던 어머니에게는 뜻도 모르면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가사를 더듬더듬 노래하는 모습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단다. 고생하는 엄마 대신 초원 위에 집을 지어 주겠다는 어린 아들이 뿌듯해서 외갓집에 살짝 자랑한 것이 친척들에게 '효자가수 삼삼이'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월은 삼삼이를 노래 대신 차가운 말만 툭툭 내뱉는 못난 아들로 만들었으며, 어머니 또한 아무 생각 없이 쏟아낸 자식의 말 한마디에 쉬 서운해하는 노인이 되어버렸다. "아직도 그때가 선명하다면서 눈물까지 보이시더라, 제발 어머니께 말씀 좀 이쁘게 해 드려"라고 한마디 하는 아내에게 "허참, 노인네 별소리를 다 하시네" 라며 자리를 떴다.
누군가에겐 이미 의미가 사라져 버린 추억도 다른 이 에게는 더 각별하게 남아있는 걸까? 나조차 잊고 지내는 내 음력 생일을 어머니는 오롯이 몸으로 기억해서 "삼삼아, 미역국 먹었나? 몸 잘 챙기라" 문자를 남기곤 하신다. 그 옛날 공사현장과 시집살이로 분주했던 한가위에 홀로 첫아이를 해산해야 했던 여린 산모의 몸이 해마다 추석이 다가오면 저절로 아들의 생일이 기억나게 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 아내가 차려준 이 미역국은 내가 아닌 어머니가 드셔야 할 생일국이다. 부모 생일도, 거칠게 내뱉은 말도, 예전에 불렀던 노래도 기억 못 하는 못난 자식이 아니라...
돌아오는 어머니 팔순 생신에는 오랜만에 노래 한번 불러봐야겠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님과 한 평생 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