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할머니는 다른 친구네와는 달리 먼 시골에 계신 것도, 그렇다고 우리 집에서 함께 살지도 않았다. 옆 동네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마을에 홀로 사시는 이유를 어린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가끔 '박복한 신세'라며 가슴 치시는 걸 보면 '우리 할머니는 속이 답답해서 혼자 사나 보다' 대강 짐작할 뿐이었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할머니의 외곬 성격과 고부 갈등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꼬장꼬장한 할머니였어도 여러 손주 중에서 집안 장손이라며 나를 제일 귀애하셨다. 나도 동생들과 싸우거나 엄마에게 혼나는 날에는 혼자 할머니를 찾아가곤 했다. 할머니는 다닥다닥 붙어있는 주택가 끄트머리에 세 들어 사셨는데, 그곳은 주인집 대문 대신 뒤쪽 길가에 난 쪽문으로 출입해야 하는 한 칸짜리 셋방이었다. 그 문을 열고 "할머니~"하고 부르면 김치찌개를 졸인 듯한 쿰쿰한 냄새가 제일 먼저 반겼다.
할머니 방에는 낡은 티브이와 장롱 외에 세간이라고는 별반 없어도 아랫목에 늘 깔려있는 솜이불 속에 몸을 뉘이면 나도 모르는 사이 까무룩 잠이 들곤 했다. 한 숨 자고 나서 마시는 할머니의 꿀물은 정말 꿀맛이었지만 꿀 값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신세타령을 들어야만 했다. 뭐 하도 많이 들어서 대충 적당한 대목에서 아~, 네~ 하는 추임새를 넣으면 그만이었지만, 그런 줄도 모르고 할머니는 "에구, 내 강아지" 하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런 수고만 빼면 할머니 방은 내게 둘도 없는 안식처이자 망명지였다. 복작복작한 집과 부모님 잔소리를 피해 도망친 그곳에서 한 잠 늘어지게 자고, 시장에서 사 오신 순대를 먹으며 티브이를 보다 보면 뚝딱 하루가 갔다. 하지만 해넘이께 슬슬 어둑해지기 시작하면 다시 엄마 생각이 나서, 자고 내일 가란 할머니 말도 뿌리치고 집으로 되돌아갔다.
정작 할머니와 함께 먹고 자게 된 것은 제대 후 대학 근처에서 자취하기로 결정하고 나서부터였다. 부모님이 할머니 연세를 고려해서 본가로 모시려 했으나 혼자 사시겠다며 계속 고집을 부린 통에 절충안으로 방 두 개짜리 옥탑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속 모르는 친구들은 다 큰 대학생이 할머니와 같이 산다고 놀렸지만 막상 동거인으로서 할머니는 불편한 상대였다. 게다가 몇십 년째 똑같은 신세타령이 되풀이될 때는 예전처럼 한 귀로 흘려들을 수 조차 없었다. 마실 가서 화투도 치고 옆집 할머니와 수다라도 나누면 좋으련만 하루 종일 방만 닦으시니 애먼 한숨만 깊어질 밖에.
하지만 무채색 같던 할머니와의 2년간의 생활에서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장면이 있다. 새로 산 카메라를 테스트할 겸 "할머니, 학교 호수 가서 사진 찍어 드릴 테니 준비하세요"라고 했더니 한참을 머리단장하고 한복까지 곱게 차려입고 나오신 할머니. 쑥스러운 듯 수줍게 웃는 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할머니도 여자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부모님 집으로 모신 할머니는 내가 결혼해서 딸아이를 낳을 때까지 사시다가 바라던 증손자는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정신없이 분주한 장례가 끝나고 발인하는 날, 입관식이 되어서야 새삼 당신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윤묘생. 토끼해에 태어났음을 표시할 뿐, 새 생명에 대한 어떤 바람이나 애정도 찾아볼 수 없는 무성의한 이름. 할머니는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사랑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평생 혼자 살아온 인생이 허무할 만큼 쉬이 연기되어 날아가는 것을 보며 할머니와의 추억도 천천히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갚을 수 없는 무거운 마음만 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