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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중 Jan 08. 2021

아빠, 나 술 먹었어... 딸국

 눈의 여왕에겐 게으른 사람마저 끌어내는 마력이 있는 것일까. 어제 내린 폭설로 하룻밤사이 온 세상은 설국이 되어버렸다. 그 마법에 이끌려 이불 밖은 위험하단 우리 식구들도 홀린 듯 밤마실을 나서게 되었다. 이미 마을은 크고 작은 썰매를 타는 아이들과  눈구경 나온 어른들로 눈꽃 축제를 방불케 했다.


 새하얀 눈에 달뜨고, 인파 속 분위기에 들떠서 아이들도 어린 시절로 돌아가 눈싸움도 하고, 나뭇가지를 흔들어 눈샤워를 하며 오랜만에 동심에 취한 것 같았다. 그런데 채 반시간도 안되어 판 잘 깨는 아내가 '역시 이불 밖은 춥네'라면서 집으로 쏙 들어가 버리니 흥이 깨지고 말았다. 그러자 엄마 따라 발길을 되돌리는 딸내미를 불러 세웠다. "딸~ 이왕 나온 김에 아빠랑 산책이나 할까" 


 막상 붙잡아 두긴 했지만 막상 둘만 남으니 적당한 대화거리가 떠오르지 않아 공연히 머릿속만 바쁘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딸에게 공부 잔소리만 했지 나란히 걸으면서 이야기해 본 적 없어 이 상황이 살짝 낯설다. 그저 소복소복 내리는 눈길을 자박자박 걸을 뿐.   


"아빠, 나 고백할 게 있어"  오랜 침묵 끝에 고맙게도 딸이 먼저 말의 문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고백이라는 생경한 단어에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말았다. '고백이라니 혹시 무슨 사고라도?  아니면 남자 친구라도 생겼나? ' 다시 머릿속은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를 떠올리느라 바쁘게 돌아간다.  

 

" 나, 며칠 전에 친구들하고 처음으로 술 먹어봤어" 하며 까르르 웃는다. 마치 속았지? 하듯.

아빠의 빈약한 상상력을 넘어서는 드라마틱한 고백은 아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딸의 예상 밖 음주 커밍아웃에  '아니 벌써 술 마실 때가 되었나' 새삼 딸의 나이를 헤아려 본다. 하긴 이제 20살이 되었으니 어쩌면 또래치곤 늦게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딸내미 말로는 11월 수능이  끝나자마자 마시자는 친구들을 기다렸다가 해가 바뀌어 성인 인증 기념으로 중국집에서 가서 짬뽕국물에 소주 한 병을  셋이서 나눠 먹었단다. 중국집이라... 그러고 보니 나도 학력고사 끝나고 이맘때 분식집에서 첫 술 신고식을 했더랬다. 교과서에서 배운  첫 키스의 날카로움을 소주에게서 기대해 보았는데 술맛이 날카롭기보다는 느끼했다. 분식집 튀김을 안주 삼았던 탓에 인생 첫술의 추억은 시뻘건 오버이트 국물로 채색되어 버린 채.


"에구.... 첫술인데 이왕이면 좋은 데서 마시지 그랬어, 그래 처음으로 술 마신 소감은  어때?"

"기분 좋을 줄 알았는데 뭐 별것 없더구먼 , 메스껍고 어지러워서 바로 잤어"


아~ 그래서 그랬구나. 대입 낙방 소식에  두문불출하던 딸이 엊그제는 웬일로 외출하는가 싶더니 조용히 들어와서는 내내 잠자던 모습이 생각났다. 합격한 친구들과의 술자리여서 아마도 딸의 인생 첫 소주 맛은 조금 씁쓸했을지도 모르겠다.


" 딸,  다음엔 아빠랑 술 마실까?"

" 에이, 아빠랑 둘이서 무슨 재미로...... 엄마랑 동생도 같이 간다면 생각해 볼게"

"동생은 고1인데 술 먹어도 괜찮으려나? "

"요즘 남자 얘들 고딩이면 다 마실걸, 그리고 가족끼린데 뭐 어때"


 이런,  세상에서 제일 소심한 꼬마 아이 인 줄만 알았는데 언제 이렇게 커서 화끈한 술꾼이 되어버린걸까?    

처음에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했던 산책길은 이내 '엄마 좀 챙겨라, 동생도 게임 좀 그만하게 해라' 같은 딸의 잔소리로 끊이질 않았다. 나중에 함께  술 마시게 되면 혹시 주사로 폭풍 수다쟁이가 되는 건 아닐지.   

그동안 나도 아내도 술을 못해서 술자리 한번 가질 기회가 없었는데 가족 중에 술 잘하는 딸내미를 둔 덕분에 이제 우리도 음주가족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어느새 시나브로 눈이 그쳤다. 밤마실에 맞춤하게 달도 밝게 비춰주어 사위가 온통 하얗게 빛이 난다. 첫눈이 마냥 신기한 강아지가 폴짝폴짝 뛰어놀다 지쳤는지 낑낑대자 주인이 번쩍 들어 안아주었다.  우리 딸도 저렇게 품속자식이었는데 이렇게 훌쩍 커서 아빠와 술 이야기를 하는 나이가 되었구나  


 그나저나 이번 주말도 춥다는데 우리 딸과의 첫술로는 무엇을 마시면 좋을까

이번엔 느끼하지 않은 안주로 마셔야겠다. 딸보다 먼저 취하면 곤란하니까. 딸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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