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처음 만나는 날, 새벽부터 봄비가 내렸다. 우산 밖으로 손 내민 빗방울의 감촉은 좋은 예감이 되었다. 보슬보슬 물기 머금은 싱그러운 표정과 가랑가랑 통통 튀는 말투, 그녀의 첫인상은 마치 이슬비를 닮았다. 만날수록 조곤조곤 나의 부족한 부분을 조언해주는 이 여자와 함께라면 메말랐던 감성도 촉촉이 채워질 거라 생각했다.
계절은 바뀌어 장마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어제도 비, 오늘도 비가 내린다. '내일도 비'라는 기대감 없는 기대. 그래서 인생의 장마도 지루한 건가? 그 옛날, 이슬비 그녀는 이제 장맛비 아내가 되어 폭풍 잔소리를 계속 쏟아붓는다. '빨랫감은 미리 내놓아라', '재활용 분류는 제대로 해라' '제발~ 앉아서 볼일 봐라' 등등...
물론 내가 게으른 탓도 있지만 마지막 부탁은 오랜 관성 때문인지 노력해도 교정이 잘 안 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아내는 아랑곳없이 비를 내리고 있다. 주야장천 장맛비처럼.
"남의 목양말 신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목이 다 늘어나서 못 신잖아"
아차차~ 여름용 목 없는 양말이 까만 신사양말보다는 훨씬 시원한지라, 빨랫줄에서 보이는 대로 거둬 신다가 아내에게 또 혼이 났다. 사실 목양말이란 게 색깔도 똑같고 크기도 비슷해서 분간이 잘 안되었을 뿐인데 상습적이라니... 조금 억울하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양말 가지고 그래"
"양말 문제가 아니잖아. 사람이 부탁을 하면 좀 들어주는 척이라도 하면 안 돼?"
결혼 생활이 길어지니 장마 시즌도 길어지는가. 아 ~ 언제쯤 이 비는 끝이 날지.
그런데 무신경하고 무감한 남편에게 황무지에 단비 뿌리듯 무던히도 노력하던 그녀가 최근에는 지쳤는지, 아니면 더 이상 잔소리가 무용하다고 판단되었는지 언젠가부터 시나브로 비를 거두었다. 아마도 대상이 빗물을 머금고 수용할 수 있는 대지가 아니라 바로바로 증발시켜 버리는 척박한 사막이란 걸 깨닫고는 이제는 비 내림을 포기했나 보다.
소원대로 장마가 끝나니 뽀송하고 쾌적해서 세상 편안하다. 그러나 혼자만의 편안함도 잠시, 메마른 일상이 계속되는 가운데 오랜 익숙함이 사라지니 뭔가 허전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동안 길들여졌나?
장맛비는 매실이 익을 무렵에 내린다고 해서 매우(梅雨)라고도 한다. 장맛비라고 하면 멋이 없지만 매화의 비라 부르니 다른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아내의 말에는 간혹 매화 같은 잔잔한 암향이 있었다. 호우시절(好雨時節), 좋은 비는 때을 알아 내린다는데, 이 매화비도 언젠가 세월이 흐른 뒤에는 맞고 싶아도 더 이상 맞을 수 없는 날이 오리라. 그때는 메마른 황무지에도 눈물이 흐를것 같다.
장마 뒤 이어지는 본격적인 무더위에 지쳐갈 즈음, 오랜만에 소낙비가 내린다. 오랜 작열감을 해갈해주는 비의 존재가 새삼 고맙다.
지나가는 소나기였나? 날씨가 활짝 개었으니 청명한 하늘 보러 산책을 나가야겠다. 잠깐~ 외출 전 주의사항 하나. 손바닥만 한 양말은 아내 꺼, 주먹보다 큰 게 내 거. 잊지 말고 구별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