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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중 Mar 31. 2020

아내만의 방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작업실을 선물 받았다는 어느 주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작업실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아니고 그냥 혼자 책 보고 자유롭게 글도 쓰는 공간인데, 해외여행 대신 작은 원룸을 1년간 빌린 것이어서 비용 부담도 적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공간에서 독립된 자아를 발견한다는 말이 부럽게 들리면서, 한편으로 우리 집에 있는 한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 집은 식구는 네 명인데 방은 세 개입니다. 대부분의 집들이 그렇겠지만 고등학생인 딸과 아들이 각각 하나씩 쓰다 보니 남는 것은 안방 하나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내는 안방에서 나와 거실에서 대부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바쁜 아이들 챙겨주기에는 아무래도 안방보다는 거실이 편하다는 이유입니다. 요즘엔 밤늦게 들어오는 고3 딸내미를 현관에서부터 맞아주기 위해 아예 잠도 소파에서 자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안방은 제 차지가 되어버려 넓은 책상까지 가져다 놓고 요즘은 아예 개인 서재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안방마님과 바깥양반의 공간이 서로 뒤 바뀌어 버린 셈입니다.


결혼 3년 차에 분가해 전셋집으로 처음 이사하는 날, 아내는 베란다까지 수세미로 열심히 닦아댔습니다.  어차피 남의 집, 무엇하러 그리 정성을 들이냐고 핀잔을 주었지만,  아내에게는 안방이 생겼다는 사실이 기쁜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점차 아이들에게, 이제는 저에게까지 방을 내주고 지금은 아내만이 자기 방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방이라는 것은 필요할 때는 문을 걸어 잠글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거실은 방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각자의 방에 “출입금지”를 써 붙여놓으면서도 필요할 때는 거실로 나와 엄마를 찾습니다. 저도 안방에만 처박혀 있다가 답답하면 거실로 쉬러 나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아직도 집 전화번호만 익숙하신지 거실 전화기만 수시로 울려 댑니다. 그나마 아내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거실마저 다른 식구들을 위한 백업 센터이자 비상대기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노라면 가끔 보조 배터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휴대폰을 충전해주기 위해 정작 자신은 재미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깡통 배터리 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보조 배터리가 자꾸만 방전되어 가는 것만 같습니다.


차가운 거실 소파에서 잠자는 아내를 깨워 안방 가서 자자고 하니,  딸내미 아직 안 왔다고 먼저 들어가라고 합니다.  "신경 쓰지 마요, 난 소파가 더 편해" 잠꼬대처럼 자신의 방 아닌 방에 점점 침전해가는 아내가 왠지 모르게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다가오는 우리 결혼 20주년에는 남들처럼 작업실은 아니더라도, 방 하나 늘려 이사 가면  아내의 방에 "작업 중 출입금지" 팻말을 걸어 주려 합니다. 


그때쯤이면 그녀도 더 이상 누구의 엄마, 아내, 며느리가 아닌 한 작업자로서 자신만의 방에서 그림이나 음악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코로나로 집 밖에서의 사회적 거리 두기뿐 아니라, 집 안에서도 가끔은 관계적 거리 두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요즘입니다. 너무 자주 말고 아주 가끔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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