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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혜진 Aug 21. 2018

편집자 네진씨의 일일

조금은 선선해진 기운이 감도는 방이다. 네진은 방에 누워 여섯시 오십분에 맞춰놓은 알람을 끄고 다시 눈을 감는다. 알람은 정확히 십오분 뒤에 다시 울릴 참이다. 어차피 다음 알림에 일어날 거, 뭐하러 알람을 맞춰놓는지 모를 일이다.


전날 쌓인 피로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샤워를 하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네진은 서둘러 준비를 하고, 여덟시 사분에 출발하는 마을버스에 몸을 던진다. 버스 기점이자 종점인 이곳에서 항상 여덟 명의 동네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탄다. 물론 서로의 이름과 나이, 직업 따위는 알지 못한다. 그저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 네진은 버스에서 내려 여덟시 이십일분에 출발하는 서동탄행 열차를 탄다. 열차가 정시에 출발하는 일은 거의 없다. 네진은 자리에 앉아 못다 잔 잠을 마저 자기 위해 다시 눈을 감는다. 지하철에서 내려 네진은 서둘러 사무실로 걸어간다. 또 오분을 넘기고 만다. 매번 일찍 나와야지 다짐하면서도 내일이 되면 또 같은 시간에 일어나는 스스로를 탓한다.


이내 사무실 자리에 앉은 네진은 저자의 원고를 교정 본다. 필기감이 좋은 제트스트림 0.7 청색 볼펜 하나만 있으면 끄떡 없다. 서너 줄씩 연결된 문장을 다시금 읽어보며 읽기 좋게 두세 문장으로 나눈다. 가끔 영문 모를 문장을 몇번이고 읽으며 저자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와도 본다. 그렇게 남의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하면 어느새 책상 한쪽에 교정지가 수두룩 쌓인다. 하루종일 이렇게 교정을 보고 있으면, 가끔은 교정이 끝나서 정갈하게 정리된 문장이 몹시도 그리워진다. 네진은 며칠 전에 읽은 김연수의 여행 에세이 속 가지런한 문장을 떠올린다. 그런 글을 다루고 싶다고 또 한 번 생각한다.


점심은 회사 안에 있는 카페에서 해결한다. 점심값이 들지 않고, 더운 날씨에 나갈 필요가 없어 좋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력이 부족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내곤 했는데, 요즘엔 그럴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다행이라고 네진은 생각한다. 점심을 먹고 남은 시간이면 진한 커피를 마시며 쉬는 시간을 보낸다. 결혼 체크리스트를 보며 그동안 진행 상황도 틈틈이 체크하고, 오늘의집 어플에 접속해 예쁘게 꾸민 집 사진을 보며 온라인 집들이를 방문하기도 한다. 일을 하면서 결혼을 준비하는 게 쉽지 않다고 푸념하며, 자투리 시간을 모두 할애한다.


오후 업무 시간에는 또 다른 원고 교정을 본다. 가제본만 4쇄인데, 수정할 게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지라 네진은 머리를 싸매고 눕고 싶은 기분이다. 맛있음 직한 음식 사진을 보며 나도 만들어봐야지 싶지만, 교정 더미에 파묻히다 보면 어느새 음식 생각은 사라지고 만다. 파란펜과 함께 교정지와 싸우다 문득 고개를 들어 시계를 확인한다. 네 시, 마의 시간이다. 두 시간이나 앉아 있어야 한다니 좀이 쑤셔 견딜 수 없는 네진이다. 이미 커피를 네 잔이나 마셨으니 이번엔 차를 마신다. 이름처럼 상큼한 향이 마음에 드는 차다. 차를 마시며 네진은 커피와 차가 없었다면 이 세상이 무지 심심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퇴근 삼십분 전, 그러니까 현재 시각은 다섯시 삼십분. 오늘 한 일을 머릿속에서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내일 해야 할 일을 간단하게 정리해본다. 내일은 2쇄를 찍은 책이 들어오는 날이다. 중쇄는 언제라도 반가운 일이다. 기획할 때부터, 그리고 원고 만들고, 교정 보는 일까지, 너무 고생했던 책이라 특히도 애정이 가는 책이다. 지치는 몸과 마음을 가볍게 만드는 중쇄의 힘이란. 퇴근하려고 보니 왜인지 자꾸만 미루었던 일이 눈에 밟힌다. 내일은 무조건 처리해야 한다. 출근하자마자 그것부터 해결하자고 다짐하며 빠른 퇴근을 위한 준비를 한다.


네진이 이곳에서 편집자로 일한 지도 오늘로 딱 1700일을 맞았다. 

네진은 내일도 이곳에서 일을 할 것이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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