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이맘때쯤, 일요일

2025.06.28.

by 이세화


축축한 공기가 눅눅하게 깔린 여름날 오후. 관수동에서 오랜만에 L을 만났다.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시간이 20분쯤 남아 근처를 둘러보기로 했다. 하늘은 탁한 회색 빛으로, 뜨거운 햇살 대신 습기가 피부에 달라붙었다. 듬성듬성 비어있는 건물들 사이로 낡은 간판들이 빛바랜 색을 반짝이고 있었다. 벌써부터 한껏 취한 행인들을 피해서 들어간 골목길에는 오래된 미용실의 파마약 냄새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생선 굽는 냄새가 묘하게 섞여 떠다녔다.


허름한 식당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소리, 낡은 에어컨 실외기가 삐걱이며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가끔씩 들려오는 사람들의 나른한 말소리가 이 흐릿한 풍경 속을 채웠다. 언젠가 들어본 것 같은 오래된 재즈 음악처럼. 모든 소음은 낮게 깔려서 하나의 불분명한 화음이 되었다. 그 불분명함 속에서 애매모호한 기억이 영화 클립처럼 떠올랐다. 결계가 어설픈 행정구역처럼, 기억도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알 수는 없었다.


결국 그 애매모호함은 정리되지 않은 채로 식탁 위까지 따라왔다. 굴과 돼지고기, 김치처럼 서로 다른 온도의 기억이 조용히 김을 내고 있었다. 우리는 스쳐가는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했지만, 이야기의 내용보다 우리가 함께 앉는 것이 이 자리의 목적임을 다행히 피차 알고 있었다. L이 아내에게 전화를 받을 겸 담배를 태우러 나간 틈에, 본격적으로 그 애매모호한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또렷해지지 않아서 애꿎은 김치만 젓가락으로 잘게 조각내고 있었다.


잠시 뒤 L이 왜 궁상떠냐고 욕을 하면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예전에 이맘때쯤 말이야", "그래 예전에 이맘때쯤", "내가 무슨 말을 했었거든?", "나한테?", "아니 그 사람한테", "아직도 그러냐 넌", "아니 그립다거나 보고 싶다거나 아직도 뭐 어쩌거나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가끔 어떤 게 기억 안 나서 짜증 날 때 있지 않아? 지금 딱 그래 무슨 말을 했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 "그걸 왜 기억해 내야 하는데 미친놈아"


"내가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했던 정말 진심의 진심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그러니까 예전에 이맘때쯤, 여름이었고, 비가 내렸고, 확실히 일요일이었어, 전등은 꺼두고, 두꺼운 암막 커튼 같은 걸 쳐놔서 암실 같은 방이었거든, 너무 오래된 방이어서 약간은 퀴퀴한 담배 냄새랑 오래된 방향제 냄새가 뒤섞여 났던 것 같아. 옆에서 작은 숨소리만 들렸고, 멍하니 그 숨소리만 바라보다가 그 사람한테 했던 말인데, 기억이 안 나.


그 이후로는 다시 스쳐가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이제 걷기 시작한 L의 아이, 책을 낸 이야기, 서로의 회사 얘기. 그리고 일 잘하고 예쁘다는 L군의 회사 여직원 이야기 따위로 끝맺으며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관수동 골목에서 나와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예전에 이맘때쯤의 나를 떠올렸다.


항상 쫓기면서 무언가 해야 하고, 조급해하면서 막상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는 채로 당신에게 사과만 하던 나에게서 지금의 나까지 돌이켜봤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무언가 해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던 당신이 떠오를 때쯤 집에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 6시에 눈을 떴다. 평소라면 다시 잠들었을 텐데, 밝아오는 창문에 퍼지는 빗소리와 아직은 덜 마른빨래에서 울려대는 섬유유연제에서 잠에서 덜 깬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 이질감과 기시감이 묘한 포근함을 주어서, 가만히 눈을 뜬 채 완전히 밝아오는 방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질감과 기시감 속에서 오래전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열 번은 덧붙인 진심으로. 정지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알람이 울렸다.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래도 잠시동안 그대로 더 반쯤 누워있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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