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6.21.
누군가 회사 밖의 사회활동이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다만 그런 사회활동이 어떤 것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며칠 뒤 출장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소나기가 쏟아졌다. 옆에 있던 상가의 간판을 우산 삼아 멈춰 서서 사회활동에 대해서 고민했다. 옆에서 쭈그리고 앉아있던 N군은 시선을 핸드폰에 고정한 채 '유기견 봉사활동을 가세요'하고 말했다. 그 쉬운 답을 왜 모르냐는 듯한 어조에 반발감이 생겼다. '마지막으로 했던 봉사활동이 20년도 전쯤이고, 그게 뭐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데?'
N군은 여전히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과장님 동물 좋아하잖아요' 하고는 내가 대답이 없자, 그제야 나를 바라보며 '아니면 이런 거 어때요?'하고 '강남 대기업 훈남훈녀 사교모임(정확하진 않지만 대충 이런 이름)'이라는 단체 카톡방을 보여줬다. 그 이름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단어가 거북했기 때문에 '내가 동물을 좋아하긴 하지' 하고 말았다.
그런 사유로 주말 아침. 편한 옷을 입고 경기도 어딘가로 향했다. 아침부터 햇빛이 뜨거웠다. 시동을 걸고, 에어컨 온도를 조정하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라디오 채널을 틀어 두었다. 다행히 차가 막히진 않았고, 논 밭과 파랗게 질린 산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혹은 아무 말이나 지껄이던 라디오 채널에서 광고만 흘러나올 때쯤. 4차선 도로와 논 밭 사이에 위치한 일종의 '섬' 같은 보호소에 도착했다.
라디오 광고와 자동차 창문을 뚫고 엄청난 개소리들이 들려왔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엄청난 개소리들이었고, 나는 그것을 고상하게 표현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천천히 주차를 하고 밖으로 나와 '섬'을 둘러보니 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지금은 그 감정이 '고요함'이라는 것을 안다. 다만, 고요함이라는 표현이 반드시 청각적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당시엔 몰랐다. 그리하여, 달리 표현할 바 없는 묘한 '섬'을 둘러보는 나에게 관리인이 다가와 인사했다.
좋은 의미로 선한 강아지 같은 사람이었다. '안녕하시냐'는 인사말 다음에는 보통 '누구세요?' 혹은 '어떻게 오셨나요?' 따위의 대화가 오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육지의 사회적인 관습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듯이, 바로 '해야 할 일'만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나와는 다르게 이런 만남이 익숙했기 때문이겠지만, 나는 그것이 일종의 '섬'의 규칙처럼 느껴졌다.
보호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세보진 않았지만, 백여 마리가 되는 친구들이 케이지 또는 우리에서 나를 향해 짖어댔다. 내가 처음 해야 할 일은 사료를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관리인은 수많은 밥그릇에 양을 달리하며 사료를 담았다. 특정 밥그릇에는 흰색 가루약 또는 물을 섞어서 나에게 건넸다. 이 안에 있는 모든 친구들이 먹어야 하는 적정량과 약을 다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이건 xx 거고요, 이건 yy 꺼고, 이건 "
내가 양손에 밥그릇을 든 채 '그게 누군데요?'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제야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아, 케이지에 이름이 쓰여있어요'라고 말해주었다. 그렇게 밥을 다 먹이고 한 마리씩 케이지에서 꺼내 풀어주었다. 보호소 앞으로 이어진 잔디밭으로 뛰어 나가는 친구들과 궁금하다는 듯이 내 곁에서 킁킁거리는 친구들의 두 그룹으로 나눠졌다.
다만 공통적으로 참아왔던 대소변을 하기 시작했다. 다음 해야 할 일은 관리인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행히 나는 강아지나 고양이의 대소변에는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그 뒤로는 쓸고, 닦고, 아까의 밥그릇을 설거지하는 단순 노동이 이어졌다. 단순 노동의 소박한 장점은 말이 필요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필요하지 않다는 점이다.
두 시간가량 이어졌던 단순 노동, 그러니까 봉사활동의 마지막 해야 할 일은 비워진 우리를 깨끗이 치우는 것이라고 했다. 보호소 한쪽 구석에 조그만 방이 하나 더 있었고, 거기에도 우리가 몇 개 있었다. 다른 친구들은 밖으로 나와서 친구들끼리 장난도 치고 놀고 있는데, 왜 이곳에 있는 친구들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해야 할 일'을 제외하고는 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내가 치워야 할 비워진 우리는 보호소 구석에 있는 방에서도 가장 구석에 있는 곳이었다. 톱밥과 이물질들이 널려있고, 배설물 냄새가 남아있는 곳. 우리에는 '중성화' '9살' '푸들'라고 쓰여있었다. 이름은 쓰여있지 않았다. 먼저 톱밥을 치워내고, 벽에 있는 이물질을 닦아내며 이곳에 있었던 '중성화된 9살 푸들, 그리고 이름은 없어진'에 대해서 상상했다. 분명히 사랑받던 시간들이 있었을 테다. 날씨가 좋은 마을 동내를 산책하고, 맛있는 간식을 먹고, 주인 곁에서 잠들곤 했을 거다. 어느 꿈에서라도 이름이 없어진 채, 이곳에 있게 될 줄 몰랐을 거다.
이름이 없어진 그 친구는 발톱으로 벽을 수없이도 긁곤 했었나 보다. 하얗게 질린 발톱 자국이 어느 비명 지르는 현대 미술품처럼 남아있었다. 정형행동. 그 마음이 어땠을지까지 상상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다만 나는 해야 할 일을 반복한다. 바닥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이물질을 신경질 적으로 미친 듯이 긁어대고 있을 때, 관리인이 돌아와 그 정도면 그만하셔도 된다고 말해왔다. '여기 있던 친구는 입양이 된 건가요?'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이 아닌 말은 하지 않는 것은 이 '섬'의 규칙이었다.
밖으로 나와서 단출한 의자에 앉았다. 논 냄새가 섞인 여름 바람이 땀을 식혀왔다. 엄청난 개소리들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있지도 않은 풍경소리가 파랗게 울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쯤 관리인이 시원한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그제야 다시 친구들이 보였다. 친구들은 아까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룹 지을 수 있었다. 당장 한강공원에서 주인과 뛰어놀고 있어도 이질감이 없을 것 같은 친구들. 그리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
가령 뒷다리를 절던 늙은 골든 리트리버, 특히는 두 시간 전부터 내 옆에서 알짱거리던, 한쪽 눈이 하얗게 탁해져 있는 프렌치 불독. 그 친구를 보니 집에서 곤히 자고 있을 나의 고양이가 떠올랐다. 늙고, 한쪽 눈이 이 아이처럼 탁해졌지만 여전히 아이 같은, 나의 고양이. 이 친구가 왜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웠다. 남은 커피를 독한 위스키라도 되는 양 한 번에 들이켰다. 그런 나를, 하얗게 탁해진 눈으로 올려다보는 그 친구에게 무슨 말이든 건네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차마 규칙을 어기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섬'을 빠져나와 영동대교를 건널 때쯤. '다음에 또 올게, 그때는 네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말했다.
부끄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