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휴관이 끝나고 첫 폴댄스 수업을 받던 중 눈에 이상이 느껴졌다. 눈앞에 검고 붉은 빛의 부유물들이 물감처럼 번졌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좀 무섭다. 흰자에 핏줄이 터지는 건 남들보기엔 좋지 않지만 심각한 일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고 시각에도 전혀 지장이 없다. 그러나 눈동자에서 그런 현상이 보이면 심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침착하게 수업을 끝마칠 수 있었던 건 십년전에도 비슷한 증상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한쪽 눈 앞에만 구름이 병풍처럼 펼쳐졌다가 점점이 부서지면서 분산되고 비문증이 심해졌다. 그때는 시신경이 터져서 출혈이 있는 게 원인이었다. 출현의 원인은 알 수 없다고 했다. 시신경은 그 뒤로 흔적없이 아물었고 그 뒤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번에는 다른 쪽 눈에 비슷한 증상이 나타났다. 나는 또 시신경 출혈이라고 생각하고 다음 날 안과에 갔다. 정밀검사를 했는데 이번에는 시신경 출혈이 아니었다. 망막에 차 있는 젤 형태가 액화되면서 약간씩 떨어져 나와 생긴 현상이라고 한다. 그냥 노화현상이라서 특별히 조처가 필요없다고 했다. 그 외에 망막이 찢어지거나, 백내장, 녹내장 같은 이상 증상은 없다고 했다.
이런 증상이 있으면 얼마간은 비문증이 심해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완화된다. 하지만 백프로 깨끗해지진 않는다. 크게 불편하진 않다. 보는 데 별 지장도 없다.
그런데 웃기게도 내가 걱정했던 건 다른 데 있었다. 폴댄스에 거꾸로 서는 동작이 많아서 의사가 폴댄스를 하지 말라고 할까봐서 그게 가장 두려웠다. 그래서 물어봤더니, 의사가 운동이나 물구나무서기 같은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한다. 오, 다행~~ 뒤늦게 환희를 맛 본 유일한 취미인데 앞으로 한 5년간은 별탈없이 열심히 폴을 타고 싶다.
그순간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와일드>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리즈 위더스푼의 어머니 역으로 나온 로라 던이 척추암 진단을 받은 뒤, 의사에게 던진 질문은 "말은 탈 수 있나요?"였다.
생명이 위험한 상태인데도 그녀는 가장 좋아하는 승마를 못할까봐 가장 걱정이 됐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딸인 리즈 위더스푼은 엄마의 철없는 질문에 고개를 돌린다. 엄마는 다시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고, 리즈 위더스푼은 그 뒤로 엄청난 방황을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후 리즈 위더스푼이 제작자로 참여해 만든 영화다.
인간이 원하는 건 어쩌면 대단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이 무너지는 건 어쩌면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닌 일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인간을 다시 일으키는 것 역시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어떤 이벤트일 수 있다.
망가진 정신을 되살리기 위해 남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엄청난 육체적 고통과 두려움 속에 자발적으로 뛰어들었던 그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