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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희 Oct 06. 2024

시시한 행복



어릴 적 살던 이층집은 동서로 창과 현관이 난 집이라 이른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 잠에서 깼다. 늦은 오후에는 작은 마루로 길게 뻗어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가늘게 뜬 채 미간을 잔뜩 찌푸려야 했다. 나는 강한 햇볕 때문에 그 이층집이 참 좋았다.



햇살이 길게 비쳐 드는 집

내 촌집은 정남향이다. 그런데 처마가 늘어져서인지 남쪽으로 향한 마루로 햇볕이 뻗어 들어오지 않는다. 두 해를 고민하다가 대안을 찾았다. 부엌에 서쪽으로 채광창을 냈다. 늦은 오후가 되면 빗살무늬 유리블록 창으로 지는 해가 반짝이며 길게 비쳐 들어오게 되었다. 일 년을 더 있다가 남쪽으로는 가로로 길게 창을 내서 마당에 심은 나무의 윗동아리와 파란 하늘이 보이게 되었다. 동쪽으로는 마당이 보이도록 투명한 유리를 낀 터닝도어를 달아서 아침이면 환한 햇볕이 제법 뜨겁게 비치게 되었다.

마루의 큰 창 쪽은 아직 수리하지 않아서 옛날 옛적에나 보던 얇디얇은 단창이라 겨울이면 꽤 춥다. 그럼에도 나는 겨울을 기다린다. 이 촌집에서 내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마루에는 차가운 겨울이 되면 낮아진 해가 비스듬히 길게 들이비친다. 그 빛줄기가 뭐라고 찬 기운이 술술 드나드는 마루에서 덜덜 떨면서도 나는 겨울을 기다린다. 멀리서부터 길게 비껴드는 햇빛을 볼 때면 좋아서 히죽히죽 웃음이 나온다. 이런 게 행복인 듯싶다.



세네카는 말했다

로마 시대의 현자 세네카는 행복해지려는 자는 다음 둘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미래의 불운에 대한 두려움, 과거의 불행에 대한 기억. 후자는 더는 우리를 어쩌지 못하고, 전자는 아직 우리와 상관없는 일일지니.

나는 언제나 이 둘과 공존한다. 마음 한구석에 불행이 있다고 행복하지 못할 까닭은 없다.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의 어떤 불운에 대한 공포는 아직 만나지 못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엎치락뒤치락 선두를 다툰다. 지나간 불행이 깊게 각인된 어두운 상처는 어릴 적 모르는 동네를 탐험하며 얼굴 가득히 따스하게 뒤덮은 햇살에 히죽거리던 아련한 기억에 덮여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소심한 행복

우리는 무언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갈구하고 성취할 때 행복을 느낀다. 세네카가 일찍이 또 말했다. 행복은 갈망하는 것을 이루고, 가진 것을 갈망하는 것이라고. 무슨 선문답 같은 말은 허를 찌르고 골똘한 상념에 빠뜨린다. 성취한 것에 만족하라는 말인가? 새롭게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했다고 행복하지 못할 까닭은 없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것을 갈구하고 이루려고 애쓰기도 하지만, 힘들고 오래 걸린다. 당장 나를 일으켜 세워줄 자잘한 힘이 필요할 때가 잦다.

그럴 때 내 이 '소심한 행복론'은 꽤 유용하다. 원래 나에게 있던 것이 없어졌다가 다시 올 때 나는 소심하게 행복을 느낀다. 살다 보면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것을 나는 무시하기로 한다. 받아들이거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인 양 무시하면서, 언젠가는 저절로 없어지기를 바라면서, 나는 소심한 정신 승리에 만족한다.



시시한 행복

행복은 언제든 우리에게 올 준비가 되어 있다. 대단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한기가 가신 봄날, 낯선 동네를 지나다가 마주치는 단정하게 가꿔진 남의 집 앞마당. 한여름, 키 큰 옥수숫대에 올라 제 몸 색과 같은 이파리 사이에 숨어 할딱할딱 숨 쉬는 청개구리. 늦가을부터 내 촌안으로 깊숙이 비쳐 드는 눈 부신 햇살 한 줄기. 이런 자잘한 것들에 눈길을 주고 나지막한 감탄사를 터뜨릴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아직 오지 않은 무언가,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과 암흑처럼 시커먼 기억은 무겁게 무겁게 가라앉아 잘 떠오르지 못한다. 지금 마당에서 팔랑팔랑 이 꽃 저 꽃 옮겨 다니는 저 작은 흰나비가 느낄 법한 가볍고 하찮고 시시한 행복이 마음 위에 동동 떠다닌다.  






동쪽을 바라보는 부엌문. 말할 수 없도록 고생스러운 과정이었다. 도어록도 참 힘들게 달았다. 기가 다 빨려 모자이크타일은 붙이다 말았다. 이 촌집에서 나와 냥이의 최애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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