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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영희 Sep 22. 2024

고요한 삶


홀로 고요하게 외떨어져 있는 것이 지독히도 싫었던 시절이 있었다. 언제나 전화번호를 뒤적였고, 찾아갈 사람을 만들어 불쑥불쑥 찾아갔다. 한 마흔쯤부터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남들도 그 나이가 되면 그런 줄 알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언제든 어디서든 세상과 연결될 수 있게 하는 인터넷 덕분이었다. 



떠나보내기, 떠나기

오래된 연인이 떠난다. 그리울 거라거나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을까 같은 말은 오가지 않았다.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다 마지못해 서로의 팔을 풀었다. 나는 돌아서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몇 발짝 걷다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깊은 곳에서 이미 아련해지기 시작하는 그리움에 목이 멨다.


몇 년이 흘러 서울에 잠깐 방문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다음날 만나자고 하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금 가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달음에 그가 머문 호텔로 달려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심장이 엇박자로 제멋대로 뛰었다. 문이 열리자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나타났다. 


반갑다거나 잘 지냈냐 거나 하는 말은 오가지 않았다. 감탄처럼 서로의 이름만 내뱉으며 조금은 촉촉한 것 같은 눈길만 주고받았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그가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편의점에서 사다 놨다며 냉동실에 넣어 둔 맥주캔을 내밀었다. 내 맥주 취향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술을 끊은 지 오래되었으면서도 아닌 척 그가 내민 캔을 받아 톡 소리가 나게 땄다. 차가운 맥주를 한 모금 홀짝 삼켰다. Bettersweet. 씁쓸하고 달콤한 탄산이 입안을 쏴 하며 쏘았다. 얼음 같은 맥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약간 소름이 돋았다. 그리움이 사무쳤었는지 눈물이 왈칵 올라오는 걸 겨우 참았다 


나눌 이야기가 별로 없었다. 맥주가 미지근해질 즈음 우리는 다시 헤어졌다. 잘 지내라거나 잘 살라거나 하는 말은 오가지 않았다. 숱한 감정을 담은 깊은 눈빛만 주고받았다. 그가 내 삶에 없어도 이제는 동요하지 않는다. 살면서 한두 번 잠깐의 재회면 됐다. 다시 만나지 못해도 괜찮다. 나는 이렇게 도시를 떠났다.



소박한 고요함

지나간 사랑을 다시 만난 들 더 나눌 이야기는 없다. 그저 흐릿하게 빛바랜, 한편 아릿한 추억만 있을 뿐이다. 내게 도시는 오래 만난 연인이다. 자연은 첫사랑이다. 사랑인 줄도 모르고 지나갔던, 그래서 평생 한 번도 애달아하며 그리워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첫사랑이다. 


어린 적 살던 동네에 꽤 높은 뒷산이 있었다. 어릴 때 시선이라 지금 가면 분명 나지막한 야산일 테다. 한 열한 살쯤에 나는 혼자 야산에 올라가 산딸기도 따 먹고, 이름 모를 돌멩이도 주우며 놀았다. 두려움과 설렘을 한 번에 느끼게 했던 짜릿하고 대단한 모험이었다. 그때 나는 소박한 자연의 고요함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한 삼십 년 지나서야 깨달았다. 고요함은 홀로 만끽하는 것이라고.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조차 들리지 않는, 인공의 소리가 없는 절대 고요는 홀로 있을 때 들른다.



바람이 데려온 도시의 냄새

무성한 녹색의 대지 위로 마지막 여름비가 세차게 내린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가까이 들으려고 창가로 다가갔다. 열어 둔 창으로 선들바람이 들어와 뺨과 어깨를 스쳤다. 물기를 머금은 풀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풀 냄새는 희한하게 도시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도시의 소란스러움, 귓가를 스쳐 흩어지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들, 떠다니는 소음들, 도시의 냄새들. 그리움 같다. 그리운 이는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기만 하면 됐다.







하나도 무섭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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