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7개월의 첫 회사 생활을 끝내며
대학졸업 후 닥쳐온 긴긴 번아웃을 극복한 저는 노는 게 지칠 때쯤, 취업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취업준비를 한 이후에 한 달쯤 되었을 때 정말 신기하게 첫 회사에 인터뷰를 보고 그렇게 저는 IT 스타트업에 재직하는 PM으로 직장인이 되었네요. (제 취업 준비 관련 글도 브런치에 있습니다:) 취준생은 슬퍼할 시간이 없어요를 참고해 주세요!)
약 1년 7개월이 흐르고 저는 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이 배우고 성장하고, 아프고 힘들었네요. 첫 회사고 경력을 생각해서 2년을 채우고 싶었지만, 5개월을 더 투자할 만큼 저에겐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다음 이직할 곳도, 계획도 없지만 그래도 퇴사. 해버렸습니다!
아직 서류상으로는 퇴사처리가 된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 출근은 했기에 회고를 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다음 새로운 시작을 잘 준비하고자 하는 마음의 다짐도 될 수 있겠네요.
지금부터 작성하는 내용은 실제 회사에 제출한 '퇴사부검'을 바탕으로 일부 내용을 수정한 것입니다.
저는 매년 회사가 입주한 공유 오피스에서 복지 서비스로 제공하는 무료 심리검사를 받아보곤 했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진행한 심리검사 결과와 올해 결과를 보고 1년 동안의 제 에너지의 급격한 소진을 체감했었죠. 현재 상태가 일을 하는 것보다는 자신을 돌보아야 할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퇴사를 하기 약 2,3개월 전부터 10명 정도 되는 메이커(개발자, 디자이너 등)와 1달 넘게 노력하여 만들어낸 프덕트가 마침내 출시되고 작지만 조금씩 회사와 제가 바라는 성과를 만들어냈지만, 그 사실 자체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제 모습을 보고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깨달았습니다. 프로덕트 매니저이자 기획자인 제가 프로덕트에 대해 감흥이 없다는 게 사실은 꽤나 절망적이더라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저라는 사람에게 있어 '나 자신'이 가장 중요한데, 제가 저를 돌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였으며, 이를 위해 더 이상 늦지 않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지금의 상태는 제가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심한 번아웃을 느꼈던 대학 졸업 직후와 비슷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물론 올해 초뿐만 아니라 주기적으로 아웃 증상을 느껴서 회사 동료들이나 대표님과도 캐치업을 진행하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그때에는 바쁨으로 이겨낼 수 있는 무기력함의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그 정도를 벗어난 상태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에너지가 떨어졌는지 생각을 해보면 주된 3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1. 약 1년 동안 BM을 포함하여 수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쉼 없이 달려왔지만 회복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회사를 다니는 1년 반정도 동안 총 6개의 스쿼드를 옮겨 다녔고, 진행한 프로젝트 수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최소 30개는 되는 것 같습니다. 각 스쿼드 그리고 새로운 중요한 프로젝트는 교육이라는 분야에 속해있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주요 타깃이 달랐기 때문에 기획뿐만 아니라 프로젝트/프로덕트 매니징을 위해서는 짧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지식을 끊임없이 습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회사의 생존 여부가 달려있는 BM을 위한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면서 정신적인 휴식도 잘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200시간 근무를 넘긴 월도 여러 번 있었고, 어쩔 때에는 법정 근무 시간을 넘겨서 실제보다 근무 시간을 줄여서 등록하기도 했었습니다. 타지에 살기 때문에 매번 밤늦게 귀가하는 부모님의 걱정이 더해갔고, 부모님을 걱정시키기 싫어서 일찍 자서 연락을 못했다는 둥 이런저런 변명으로 제 바쁨과 피로함을 가려보려 하기도 했습니다. 같이 퇴근하던 다른 PM, PO 분들과는 '조금 있다가 만나요~'라는 웃기지만 슬픈 인사를 하기도 했었네요.
한 프로젝트나 분기가 끝나면 에너지를 쓴 만큼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TMI: 실제 F1 경기에서도 장비 점검 및 교체, 연료 충전 등을 위해 잠시 차가 일시 정지하는 시간이 있고, 우아한 형제들에서도 이런 휴식 제도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이 시간은 에너지를 채우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이전 프로젝트를 충분히 회고하며 더 나은 다음을 위한 배움을 정리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정신없이 프로젝트만 돌려가면서 저는 깊은 고민도 배움도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꾸준히 맞이했던 저는 그만큼 성장하고 배우는 속도도 빨랐지만, 한 편 쉬는 것 대신 주어진 새로운 과제들을 잘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며 남들보다 배로 더 에너지를 빨리 소진하게 되었습니다.
2. 많은 역할과 책임이 저를 움직이게 하면서도 저에게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첫 회사 생활 시작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에 저는 기획 챕터를 이끄는 리드가 되었습니다. 사실 PM으로서 배우고 해내야 할 일들도 매우 많지만, 이 외에도 챕터의 리드로서 챕터의 문화와 기반을 닦고 챕터의 의견과 팀의 의견을 조율하고, 얼라인하는 그런 일련의 일들이 제게는 쉽지 않았습니다. 제게 주어진 역할들은 저에게 동기부여가 되는 동시에 막중한 책임감과 부담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정말 기본적으로 잘 수행해야 하는 PM이나 기획 업무를 잘 진행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의문점도 항상 존재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제게는 불안함과 스트레스로 다가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기획 챕터의 리더로서 경험한 것들에 대해서는 제 연차에서는 쉽게 접하지 못한 가치 있는 것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이 성장하기도 했고, 프로세스 개선을 통해 개발 과정을 훨씬 더 효율적으로 만들어 본 경험은 이후 제 커리어에도 아주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 예상합니다.)
3. 도전하지 못하고 실패하지 못했고, 실패로부터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회사를 떠나는 이유 중에 주요한 이유는 성공하기 위해 뒤따를 수밖에 없는 무수한 도전과 무수한 실패, 그 실패로부터 얻는 교훈과 깨달음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회사에 다니면서 제가 가장 많이 되뇌던 말은 ‘Done is better than perfection’이었습니다. 완벽주의 성향이 있었던 저에게 제일 필요한 건 ‘일단 해보자’라는 마인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테일한 부분에 신경 쓰기보다는, 일단 작더라도 핵심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작업을 했었다면 더 좋은 방향으로 더 빠르게 나아갔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최근에 읽은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과 '빠르게 실패하기', 최근에 원티드 랩에서 주최하는 PO/PM 세션에서, 모두의 이야기는 달랐지만 하나의 공통된 교훈은 실패는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며, 많은 실패를 빠르게 경험하고, 무엇보다 그 실패로부터 배움을 얻어 조금씩 성공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저희 팀도 리스크를 계산하기보다는 해볼 수 있는 것들을 먼저 시도해 보는 추진력이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해당 프로덕트의 임팩트를 모르기 때문에 실험을 하는 것이고 그 실험에서 얻은 결과로 다음 실험을 이어 나가야 합니다. 그 과정이 저에게는 필요했습니다.
팀 자체가 리스크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조바심과 걱정이 있고, 임팩트는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수치적으로 내부를 설득하는 것에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였다는 점입니다. 물론 사전에 주어진 정보로 최대한 리스크가 발생할 수 있는 부분들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만, 의사결정을 위해 필요한 데이터 확인 및 분석 작업이 오히려 기획이나 실제 프로덕트 개발보다 더 많은 리소스를 투입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회사에는 데이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분이 없었기 때문에 데이터 저장 관련 설계에서부터 택소노미 관리, 추출, 그리고 분석까지를 기존 업무와 병행을 하다보니 오히려 중요한 기획 업무를 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스타트업에 맞게, 기민하게 실험을 해보고 결과를 확인하고 개선하여 더 나아가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시도를 제가 해보려고 했지만 이미 너무 에너지를 잃었고, 더 이상의 설득과 변화보다는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떠나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아쉬움은 있지만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결정에 후회는 없습니다.
우선 프로젝트/프로덕트 매니징과 기획을 하며 '일' 자체를 배운 것이 가장 큽니다. "아 이런 게 PM이구나"하는 순간들이 쌓여 나라는 사람이 PM으로 일하는 방법을 조금씩, 차근히 배워나갔습니다. 이런 내용은 추후에 더 자세한 글로 한 번 다뤄보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과 협업하고 이야기하며 특히 '함께'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회사에 입사하기 전에는 혼자서 일 하는 것을 매우 선호했지만 지금의 저는 전혀 아닙니다. 끊임없는 의사소통과 논의, 그리고 각종 내용들을 정리하는 것에 지치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서로의 합이 점점 맞아가고, ‘척하면 착’ 하는 그런 짜릿한 순간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노력해서 만든 프로덕트가 출시되었을 때의 희열, 실제 사용자들의 반응에서 오는 감동은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라는 사람에 대한 인지가 넓고 깊어졌습니다. 회사라는 새로운 환경에서의 ‘나’를 새롭게 경험하며 그동안 편안하고 익숙한 관계가 아닌 공적인 자리에서의 저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팀원들로부터 받는 피드백으로 자신감을 느끼기도 하고 제가 부족한 부분에 대해 더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피드백은 ‘다시 한번 더 일을 해보고 싶은 PM’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라는 사람이 주는 좋은 영향들을 받고, 저로 인해 회사에서의 시간이 즐겁고, 그 즐거움이 다시 사용자에게 느껴지는 그런 선순환을 만들어내는 경험을 해 본 것이 이 회사에서 저에겐 최고의 순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 많은 피드백을 받으며 스스로가 그런 말들을 소화해 내고 제 것으로 만들면서 제가 저를 더 많이, 정확하게 알게 된 점이 새롭게 배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좋은 동료들을 만난 것 자체가 저에겐 참 감사한 일입니다. 제가 팀을 떠나고자 할 때마다 망설였던 것은 '다른 곳에 가면 이렇게 좋은 동료들과 일할 수 있을까?'라는 점이었습니다. 개개인이 정말 책임감 강하고, 프로페셔널하고,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 함께 머리를 싸매고 프로덕트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함께 몸을 내던져 일했던 기획자분들, 부족한 PM을 믿고 함께 더 나은 프로덕트를 만들어준 개발자분들, 예쁘고 쓰기 편한 UI/UX를 위해 정말 많이 노력한 디자이너분들, 우리의 프로덕트를 잘 알리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마케터분들, 프로덕트 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운영 및 그 외 업무를 담당해 준 운영 관련 팀원들까지. 좋은 동료들과 일 했고 그들을 통해 오히려 많이 배웠습니다. 이 글을 보실지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더 감사의 말씀과 존경심을 표하고 싶네요 :)
저에게 이 팀은 저에게 있어 PM이라는 직무 적합성을 검증하는 실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직무가 100% 아주 잘 맞아 천직이라고 확신했다거나, 반대로 이 직업은 전혀 맞지 않는다거나 등의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나쁘지 않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네요.
저는 잠시 시간을 가지며 제 상황과 컨디션에 맞게 다음 실험을 진행해 볼 가설을 세워볼 예정입니다. PM과 유사하지만 서번트 리더십을 발휘하는 제 성향과 조금 더 맞다고 생각되는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커리어 전환을 고려해보기도 하고 있고, 환경이 잘 맞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조금 더 기민하고 빠르게 실험하는 다른 회사로 이직하여 PM 업무를 다시 한번 더 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아니면 PM 업무를 하면서 더 배워보고 싶은 것(데이터 분석, DBMS 등)을 공부하는 것도 고려 중입니다. 혹은 지금은 에너지를 채우는 것에 집중해서 당분간은 쉬면서 제가 좋아하는 일들을 해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우선 지금은 PT 30회를 질렀기 때문에 매일 운동을 가고 있습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꾸준히 운동을 했지만 진득하게 배워보고 싶고, 실제로 몸을 좀 키워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질러버렸습니다. 덕분에 늦잠도 못 자고 매일을 회사원 시절보다 더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잠도 아주 잘 자고 있네요ㅎㅎ (퇴사 = 만병통치약)
그 외로는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일기' 사이드 프로젝트를 계획 중에 있고, 사진 찍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저이기에 네이버 스마트 스토어로 사진을 활용한 제품을 팔아볼까 합니다. SNS를 통해서 다른 PM분들이랑도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거나 이런저런 서비스에 대한 리뷰 및 추천을 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물론 중간중간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업데이트를 하고 관심 있어 하는 회사에 지원도 꾸준히 해볼 예정입니다. 저는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원해서 대학원에 대한 고민도 같이 해볼 것 같네요.
쉬는 게 지겨워지는 순간이 바로 저에게는 에너지 충전이 완료되었다는 시그널이기 때문에 그때 다음 가설을 확정하고 힘차게 다음 실험을 시작해보려 합니다!
이전 회사에서 배우고 기록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는데 바쁘다는 이유로 하지 못했어서 그런 글들을 이제는 조금씩 적어보려고 합니다.
한평생을 계획적으로 살았고 지금이 2번째로 무계획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다분히 계획적으로 보이긴 하네요) 대학 졸업 후 정말 놀았던 시기보다는 두려움, 불안감이 덜 해서 조금 더 성장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기특한 순간이 아닐 수 없죠!
이 시간이 저에게 꼭 필요한 시간일 거라 믿습니다. 첫 번째 회사 생활을 잘 마무리했음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제 결정과 미래를 응원해주시는 댓글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힘이 필요해요~!
아무쪼록,
회사원 끝! 백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