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없는 삶을 위한 우리의 도전기
어느 날, 내가 핀란드에서 다니던 학교로부터 'Plastic-Free Challenge'라는 제목으로 이메일이 한 통 도착했다. Plastic-Free, 즉, '플라스틱 없음을 위한 도전'이라, 많이 들어본 듯하면서도 생소했다. 평상시 내가 환경운동에 관심을 가져왔다고 나름 자부해왔음에도 말이다.
가만, 그게 맞는 것 같다. 플라스틱이 나의 일상에, 어디를 가든 너무나 당연하게 존재했기에, 그리고 내가 저렴하게 구매했던 그 물건들이 '플라스틱'이라는 인지 조차 실은 별로 없었기에.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해본 적 없던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호기심이 생겼고, 아이디어가 떠오른 것도 아니지만 우선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회에 지원했다.
이는 분명, 나에게, 그리고 지구에게 의미 있는 어떤 일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국에 있는 엄마와 오랜만에 영상통화를 하며, 어두컴컴한 새벽길을 걸어 기차역에 도착했다.
아침 일찍 도착한 대회가 열리는 도시, Kotka역에서 내렸다. 이 이른 아침에 이곳에 모인 이들은 다 나처럼 이 대회에 참가하기 기차를 타고 온 듯했다. 열 명 남짓 되는 우리를 마중 나온 인솔자분들이 건너편에서 환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른 아침의 눈부신 햇살이 기차역 바로 앞 바다에 비추어 반짝였다. 핀란드 남부에 위치한 아름다운 해양도시 Kotka, 겨울바다와 그 앞에 쌓인 흰 눈을 동시에 볼 수 있다니. 이상한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그때의 기분은 춥지만 동시에 시원했다.
근처 카페에서 아침 식사로 따뜻한 커피와 핀란드식 꽈배기 같은 달달한 빵, 그리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핀란드 온 국민이 즐긴다는 핀란드 전통 음료, 글로기(Glögi, 따뜻하게 데운 무알콜 와인, 견과류와 말린 과일을 넣어 먹기도 한다)를 맛보았다. 아직은 어색한 공기 속에서 우리들은 수줍게 눈을 마주하며 앞으로의 일들에 대한 기대를 잠시 나누었다.
아침 식사 후 바로 대회 장소에 도착했다. "X-LAB Kotka". 어떤 즐거운 실험들이 이루어지는 곳일까.
내부는 벌써 크리스마스 감성이 물씬 나는 아기자기한 데코레이션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중앙에 우리를 기다리는.. 알록달록한 레고 조각들???
전혀 상상도 못 한 풍경이었다. 당연히 앞에는 발표를 위한 무대가 있고, 사각형 혹은 원형 테이블이 군데군데 놓여있고 우리는 바로 노트북을 켜고 늘 아이디어 회의를 진행할 것이라는 내 머릿속 그림과는 달리, 준비된 것은 화려한 레고 조각들과 "Plastic Free Challenge with Lego Serious Play"라고 적혀있는 소박한 스크린.
조금은 어리둥절해있는 우리 앞에 레고 티셔츠를 입은 진행자 선생님이 등장했다.
우리가 하게 될 것은, 당장 머리를 쥐어짜며 솔루션을 내기 전에, 레고를 가지고 놀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 놀이를 하다가 지쳐있는 자신들을 발견하게 될 거라는 말씀도 덧붙였다.
무작정 레고를 가지고 노는 것은 아니었다. 간단한 절차와 룰이 존재했다.
첫 번째, 레고를 통해 3가지 상상력을 발휘해본다.
1. Describe something existing - what is happening, sense making, seeing new possibilities and opportunities. 현재 존재하는 것을 먼저 만들어본다. 무에서 바로 유를 창조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할 것이다.
2. Creating something new - seeing what isn't there, evokes new possibilities combination, recombination or transformation of things or concepts, brainstorming, thinking out of the box, innovative and differentiative strategies. 좀 더 상상력을 더하여, 이제 정말 새로운 것을 만들어본다. 완전히 새롭지 않아도, 약간의 변형을 하거나 아이디어를 더하는 방법도 있다.
3. Challenging something existing - Challenges and Destroys what is there and assumes nothing, deconstruction, sarcasm, negation, not improving the old, throwing it all away and starting all over - for example Nokia wood/rubber boot company -> mobile phones. 요약하자면, 이제 정말 기존에 것에서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보는 것이다.
단, 머리를 쓰지 말고 손을 쓰라고 하셨다. 아니, 머리로 먼저 구상을 하고 손으로 만드는 것 아닌가? 라는 나의 마음속 의문과 달리, 우리의 머리가 아닌 손이 움직여서 반대로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것이 규칙이었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단 3분. 분명 놀이라고 했는데... 아 그래. "Lego"와 "Play" 사이에 "serious"라는 단어를 빼먹으면 안되었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늘 플랜부터 열심히 짜던 우리들은, 각 미션이 시작하자마자 바로 손을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뭘 만들어야 할지 최소한의 브레인스토밍이라도 해야할 것 같았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진행자 선생님은 계속해서 손을 쓰는 것을 강조했다. 익숙한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 먼저 만들고, 여기서 아이디어를 얻는 '거꾸로 생각하기' 훈련이었다.
다들 머리를 안쓰려고 쩔쩔매느라 에너지를 소진하는 사이 시간은 꽤 흘렀다.
점심을 먹은 후, 오후 세션에서는 앞서 구상한 아이디어를 응용하여 이를 더욱 구체화하고, 각 팀에서 한 아이디어를 선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하여 드디어 나온 우리 팀의 아이디어! 핀란드 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반려동물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장에 존재하는 제품들의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플라스틱이다. 문득 이것을 바꿔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레고로 표현하고, 어떤 고객들이 관심이 있을지 팀원들과 생각을 공유했더니 다들 꽤 흥미있어했다. 플라스틱 패키지를 쓰지 않는다면?
강아지들의 장난깜, '개껌'의 재질로 사료 패키지를 만들면 어떨까? 그럼 나중에 내용물을 다 먹은 후에 패키지도 먹을 수 있어 아예 쓰레기가 발생되지 않는 것 아닐까? 라는 작은 생각에서 출발하여 함께 해결책을 논의해보았다.
하루종일 레고만 가지고 놀았는데 어느새 하루가 다 갔다. 점심도 간식도 푸짐하게 뭘 자꾸 주는데 이제 저녁시간이라고 피자를 고르란다. 당연히 몇 판 시켜서 나눠먹겠지 했는데 정말 각자 고른 메뉴대로 한판씩 시켜주 것 역시 개인주의 문화의 산물일까. 늘 그렇듯 베지테리언/비건 옵션이 존재했다. 비건 피자가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거짓말 안하고 한 판을 다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 '이제 본격적으로 달릴 시간인가' 하고 주위를 살펴보는데 벌써 돌아가는 사람들도 몇 있었다. "나는 오전에 집중이 잘 되서 내일 일찍 와서 하려고", "집이 편에서 집에서 작업하려고".
아니, 이것 역시 에너지 드링크 10개씩 책상에 갖다두고 치열하게 밤을 새던, 내가 여태 경험했던 한국에서의 해커톤 대회의 그림이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핀란드에서 참여한 수 많은 대회들의 분위기가 다 비슷했다. 이런 대회가 4개정도 되는데 정말 다 이런 분위기였다. 이들은 '우승'에 욕심이 없는 것일까 '워라벨'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일까. 문득 궁금해졌다.
어떤 이들은 남아서 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내일 일찍 와서 한다는 또는 편하게 집에서 작업한다는 등 이유는 다양했다. '대회'라고 해서 모든 시간 숨만 쉬고 대회에 치열히 몰두하기보다는, 중간 중간 자신에게 충분한 쉼을 주는 이들이었다.
"이 주위에 근사한 펍이 있어서 한번 가보려고 하는데, 채리 너도 같이 가지 않을래?"
원래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다른 나라에 가면 꼭 한번은 그곳의 맥주를 맛본다거나 등에 대한 감흥은 없었지만, 대회에 참여하면서 친해진 베트남 친구가 여기는 꼭 가봐야 한다며 나를 유혹했다. 바 문화가 궁금하기는 했다. 내부 사진을 자세히 찍지는 않았지만 역시 하키의 나라답게 TV에서는 아이스하키 경기가 펼쳐지고 있었고 바 내부도 스포츠 경기 컨셉으로 재미있게 꾸며져 있었다.
다음날 아침은 거의 준비 마무리 분위기였다. 9시정도 모여 아침을 먹고 최종 발표장소인 Phytaa라는 도시(한국으로 따지면 읍이라고 할 수 있는 규모)로 이동했다.
왜 학교 캠퍼스나 근처 다른 장소가 아니라 여기까지 이동하냐고? 알고 보니, 이 도시에서는 circular economy, 즉 순환 경제와 관련하여 지역의 시장을 비롯한 공무원들, 관련 기업들이 모여 함께 순환경제 시스템을 구축할 방안, 계획을 논의하는 세미나 같은 것이 열리고 있었고 우리의 발표가 그 일부 순서로 포함된 것이다. 전체 순서는 아쉽게도 핀란드어로 진행되었지만, 나 이외에 외국인 학생들도 꽤 있기 때문에 중요한 부분은 통역이 진행되었고 발표는 당연히 영어로 진행되었다.
발표장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핀란드 학생들이 먼저 와 있었다. 알고보니 이 학생들도 자신들이 준비한, Plastic-Free를 주제로 발표를 준비한 것이었다. 아이들이 준비한 ppt 첫 화면에는 "I hate muovi!" (나는 플라스틱이 싫어요)라고 적혀 있었다.
보통 어린 아이들의 아이디어는 비즈니스적으로, 정책적으로 아직 현실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어른들을 많이 보아온 나는, 이 자리에서 아이들을 초대하여 진지하게 그들의 발표를 경청하는 이들의 모습이 정말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의 순서가 왔다. 총 4팀이었는데, 첫번째 팀은 현재 유럽 몇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는 플라스틱 병(현재는 콜라병과 같은 음료를 담는 병만 가능)을 넣으면 환급해주는 시스템을 확대하여 샴푸나 비누통과 같은 것도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였다. 기계 전체를 바꾸기에는 여러 비용이 많이 드니 레고를 통해 이에 대해 실현가능할만한 아이디어를 구체화한것이 돋보였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이고, 당장 실행해보기에 매우 적절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두번째 팀은 가장 많이 소비되는 영역 중 하나인 화장품 시장을 타겟팅했다. 바로 리필가능한 화장품 용기(자세히는 모르지만 몇 국가에서는 이와 비슷하게 시행하고 있는 샵도 있는 것으로 알고있다)와 이것을 최대한 많은 샵에서 활용하여 대중화될 수 있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한국에서도 여전히 수많은 화장품 용기들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지는데(그리고 핀란드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K-뷰티 열풍이 꽤 크다는 것을 알게됐다) 환경에 관심이 있는 소비자들은 점점 늘고있고, 누군가가 이것을 시도한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세번째는 생각해보지 못한, 꽤 참신한 발상이었다. 케이블이라고도 불리는, 구멍에 집어넣고 빼면 딱 고정이 되는 zip tie는 플라스틱인데, 너무 많은 양의 zip tie가 지금도 한번 쓰이고 버려지고 있다. zip tie의 재질 하나만 바꿔도 소비되고 있는 엄청난 양의 플라스틱을 줄이는데 꽤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대안물품이 어서 개발되어 조금이라도 빨리 줄여진다면 좋을 것 같다.
마지막은 우리였다. 나름 'bite and play'라는 이름도 지어보았다. "(반려견이) 먹을 수 있는 사료 패키지"에서 시작하여, 강아지들이 많이 가지고 놀고 물어뜯기도 하는, 먼지가 많이 묻어도 걱정 없을 개껌 재료로 패키지를 만들어 그 안에 사료를 담는 것이다. 시장성, 현실 가능성 등에 대한 것은 더 검토가 필요하지만, 아이디어가 신선하고 획기적이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발표가 끝나고 이 행사에 참가한 Phytaa지역 신문의 한 기자가 우리 팀의 아이디어를 흥미롭게 보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2주 후 발간된 신문에 내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온 것을 보고도 잘 믿기지 않을 만큼 예상 못한 경험이었다.
발표 후에는 참여 기업들이 지속가능성을 위해 진행해 온 프로젝트, 앞으로 할 사업들에 대한 발표가 이어졌다. 아쉽게도 이후 순서는 핀란드어로 진행되어 정확히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참가 기업 중 한 곳인 Kotkamills라는 목재 관련 제품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제공하는 기업의 발표가 기억에 남는다.
이 기업의 발표를 들으며 그들의 웹사이트에 기재된 "우리의 임무는 편리함과 의식적인 선택을 모두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라는 문구를 실현하고자 애쓰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참고: https://kotkamills.com/products/).
한국에도 더 많은 기업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해결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 정부가 이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지지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승을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모든 팀이 결과에 기뻐하고 서로를 축하해주며 대회는 마무리되었다.
대회 이름이 참 마음에 든다. "Competition", "Contest"라는 단어보다는 "Challenge". 이는 어느 한 팀이 주목을 받기보다는, 모두의 '도전' 자체에 더욱 의미를 두는 것 같다. 신기하게도 내가 핀란드에서 경험한 수많은 대회가 모두가 그랬다.
모두가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과정을 충분히 즐겼다. 우승하지 못했다고 해서 허탈하게 돌아가는 사람은 없었다.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이제야, 이제서야 환경을 위해 조금은 그럴듯한 시도를 해본 것 같았다. 그동안의 나는 입으로만 환경 운동가였던건 아닐까, 누구도 해보지 않은 이런 상상에 도전한다는 것. 변화는 그런 작은 씨앗에서 시작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제는 입이 아닌 몸으로 더 실천해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1박 2일간의 "Plastic-free Challenge"는 단순히 플라스틱에 대한 도전을 넘어, 내 삶에 새로운 도전의 물결을 일으켰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