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학교에서 공부 쫌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나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공주에 있는 명문고에 진학했다. 청양 산골 촌놈이 도시 유학생이 된 것이다. 공주로 유학을 가게 된 나는 중학교 때까지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네 깨복쟁이 친구들과도 헤어지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2시간이 넘는 그 먼 거리를 새벽밥 먹으며 통학했었는데 그때는 그나마 친구들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면서 아버지를 졸라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때부터는 동네 친구들과도 멀어지게 되었다. 반찬 공수를 위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 오게 되니 서로 엇갈리면 한 달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초여름의 일이다. 나루터에 도착하니 친구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모두 모여있었다.
“야 니덜 오랜만이다"
"그려 간만이다. 야 근디 오늘 1년 선배들이 집합하랴”
“왜?”
“몰라. 누가 인사를 안 했다나? 참나! 언제부터 지들이 선배질 했다고”
“야야~ 뭐 우덜이 큰 잘못도 없는디 설마 뭘 어쩔라고?”
가끔 1년 선배들이 친구들을 때린다는 얘기를 들었었지만 그때는 그 말이 그냥 하는 말인 줄 알고 흘려 들었었다. 그때까지 나는 살아오면서 어느 누구한테도 맞아 본 적이 없었다. 가정에서는 물론 학교에서도 한 번도 맞아본 경험이 없었기에 내 머릿속에는 '맞는다' '때린다' 이런 개념이 아예 없었다. 혹시 누가 맞았다고 하면 무슨 잘못을 저질렀거나 맞을 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짐작만 했다. 그랬었기에 그날도 선배들이 집합시켰다는 말에 아무 걱정도 없이 집합장소로 향했다.
초여름 저녁, 정글처럼 우거진 갈대들은 처녀 머리 같은 갈대 잎을 흔들며 우아하게 우리를 반겼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끔찍한 일은 상상도 못 한 채 손으로 바람결을 느끼며 갈대밭의 낭만을 즐겼다. 강변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니 갈대로 둘러 쌓인 참호 같은 널찍한 곳이 나왔다. 그곳에는 이미 1년 후배 10여 명과 1년 선배 10여 명을 합해 20여 명이 모여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선배들은 늦게 도착한 우리 동기들은 언덕 아래에 일렬로 세웠다.
“야 xx들아! 니들 선배가 우습게 보여? 이 xx들 빠져가지고. 니들 왜 인사를 안 해?”
낭만의 갈대밭이 공포로 변하는 건 순간이었다. 나는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당황했다. 점점 심장이 쿵쾅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바람결에 역한 술냄새가 풍겼다. 선배라는 작자들은 하나같이 눈에 핏발이 서고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힐끔 둘러보니 평소 나와 살갑게 지낸 아랫동네 형도 있었고 명절 때마다 우리 집을 들락거리던 수양아들 형도 있었다. 그들 얼굴도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내가 힐끔 거리자 내 눈을 피했다.
'무슨 인사를 누구한테 안 했다는 거지?' 나는 집합 이유라고 내뱉는 그 선배라는 작자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상황판단도 안되었다. 그때 갑자기 'xx새끼들아'라는 소리와 함께 서 있던 내 가슴팍으로 발차기가 날아왔다. 혈기왕성한 사내놈이 온 힘을 다해 온몸을 던져 날라 차는 발차기는 상상 이상이었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번개를 맞은듯한 충격이 온몸에 전해져 왔다. 나는 뒤편 갈대밭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처음 겪어보는 엄청난 충격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야 , xx야 아퍼? 빨리 일어나!"
"이 xx들 정신 못 차리지. 그럼 더 맞아야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나는 공포에 질려 나는 벌벌 떨고 있었다. 무서웠다. 빨리 이 상황이 끝나기만을 바랬다. 그렇게 멘붕 상태로 무려 1시간 이상을 더 두들겨 맞았다. 한참 동안 우리 동기들 상대로 매타작을 하더니 이제는 우리 1년 후배들을 일렬로 세웠다. 나는 '이제 끝나나 보다' 생각하고 한 숨을 돌렸다. 그런데 웬걸 그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선배들은 우리 동기들에게 1년 후배를 때리라고 했다. 몇몇 동기들은 악에 받쳐 후배를 때렸다. 나에게도 후배들을 때리라고 했다. 나는 거부했다. 그 거부 결과로 나는 다시 집단구타를 당해야 했다. 그렇게 늦은 오후에 시작된 한 여름밤의 공포 극장은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제일 험악하게 생긴 자의 마지막 공포의 말이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개 XX들 니덜 한 놈이라도 오늘 일 불면 알아서 해라”
지쳤는지 선배라는 자들은 '야! 가자' 한마디를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떴다. 나는 빨리 그 자리를 뜨고 싶었다. 정신없이 갈대밭을 기어 나와 자전거에 가방을 실었다. 시원한 초여름밤의 강바람이 죽도록 얻어터진 내 얼굴을 약 올리듯 스쳤다. 남은 힘을 다해 집으로 페달을 밟았다.
"엄마! 나왔어"
대문 앞에 도착하니 쿵쾅 거리던 심장이 안정되었다.
"이이~병호 왔냐"
부엌에 있던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반겨 주었다. 비로소 안도의 한 숨이 흘러나왔다.
“아이고 왜 이케 늦었냐? 언능 밥 차려 주께”
방에 들어가자마자 내온 밥상을 보니 갑자기 맥이 쭉 빠졌다. 분명 배가 고프다고 생각했는데 식욕이 없었다. 나는 한 숟가락도 뜨질 못했다. 그때 갑자기 가슴에 통증이 올라왔다. 옆에 있던 큰 형이 뭔가 이상한 눈치를 채고 내 옷을 가슴까지 걷어 올렸다. 순간, 방안은 얼음이 되었다.
시커먼 피멍이 온몸을 덮고 있었다. 처음 본 상상하지 못한 내 모습은 끔찍했다. 나는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어린 동생의 끔찍한 상황에 화가 난 큰형은 '그 놈들 모두 죽인다'며 집에서 작대기를 들고나갔다. 형은 아랫동네는 발칵 뒤집어 놓았다. 밤새 집집마다 돌며 주범들을 찾아다녔다. 뒷날 들은 얘기로는 몇몇 주범은 그날 밤 야반도주했고, 몇은 자퇴를 했고, 몇 명은 경찰서에서 합의를 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나는 그 선배라는 작자들은 보지 않고 살았다. 위아래 동네로 이웃 같은 거리지만 명절에 시골에 내려가도 그들 얼굴을 보지 않았다. 사실 만날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학교도 달랐고 그들 중 대다수는 중퇴하고 서울로 올라갔으니 얼굴 볼 일이 생기지 않았다.
'말죽거리 잔혹사'라는 영화가 있다. 그 영화를 보는 내내 끔찍했던 내 최초의 집단폭행 기억이 소환되었다. 그 공포스럽던 갈대밭의 끔찍한 기억 때문에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친구’ ‘써니’ 같은 영화에서도 학교폭력을 소재로 다뤘다. 감독이 학교폭력을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었겠지만 영화가 흥행이 될수록 청소년들에게는 오히려 학교폭력이 미화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학폭 소재 영화를 만든다면 신중을 기해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한때는 학교 짱이었어’
종종 이런 말을 자랑삼아하는 사람을 본다. 결코 학교폭력은 미화의 대상이거나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나는 4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끔찍했던 기억을 달고 산다. 그 공포의 한 여름밤을 생각하면 여전히 등골이 오싹해지며 심장이 벌렁거린다.
나는 근 20여 년 동안 교육업계에 몸담았었다. 교육이란 학업도 중요하겠지만 최우선은 학교폭력을 없애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학폭 피해자이자 나름 교육전문가로 살아온 내 주장이다. 내가 우주 평화주의자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성장기 학교 폭력은 당사자나 그 행위자 모두에게 평생 따라다니는 끔찍한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은 나처럼 피해자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