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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딩 박사 Dec 28. 2021

선택의 기로

최연소 팀장이냐, 박사 과정 중단이냐

꿈처럼 일주일간 수업을 듣고 현실로 복귀했다. 학업과 업무를 병행하는 만큼 내가 맡은 일이 소홀할 수 없었다. 작은 틈만 보여도 학업 때문에 업무처리가 미진하다는 평을 받을 테니까. 그렇게 프로젝트 기한까지 남은 두 달을 업무에 매달려서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두 개 호텔의 브랜드 정체성 구축, 디자인 가이드라인 완성, 그리고 크리스마스 장식 업무까지.



최연소 팀장 제의와 고민의 시간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하니 대표 이사는 내게 팀장 자리 제의를 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이어서 할 수 있는 팀을 만들어줄 테니 이끌어 가보란다. 당시 내 나이는 32살. 회사 내에서 최연소 팀장이 되는 엄청난 기회였다. 4년 전 이 회사에 입사할 때 상상이나 했던 일인가. 그동안의 노력과 고생을 인정받아 기쁘고 감사했지만, 이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팀장의 역할

그간 5명의 팀장을 모시면서 내가 봐 온 이상적인 팀장의 역할은 팀원들이 각자 맡은 바 업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안팎으로 서포트하는 것이었다. 팀장은 해당 업무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팀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고, 팀이 하는 일과 성과를 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조직에 알려야 하며, 불필요하게 밀려오는 업무를 쳐내는 교통정리도 해야 하고, 조직 내에서 팀의 입지를 굳건하게 할 수 있도록 적절한 정치를 해야 한다. 팀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팀원들이 모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뒷 작업을 해주는 것이 팀장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나의 경험상 이런 역할을 잘해주는 팀장과 일할 때 즐겁고 편하게 일할 수 있었다.


고민의 시간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최연소 팀장 타이틀은 생각만 해도 달콤하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업무를 하는 팀을 직접 설계하고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내 개인적인 욕심을 생각하면 최연소 팀장 타이틀을 다는 게 우선이다. 박사 과정 병행도 힘들긴 하겠지만 어떻게든 이어 갈 수 있겠지. 그런데, 회사와 팀을 위해서도 내가 팀장이 되는 것이 맞는 걸까?


이 호텔에 입사와 동시에 신규팀에서 근무를 했고 그 팀이 와해되는 모습을 봤기에 신규팀에 대한 견제와 성과에 대한 압박이 얼마나 큰 지 익히 알고 있었다. 신규팀은 1년 안에 눈에 띄는 성과나 혁혁한 공을 세우지 않으면 다른 팀에 흡수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불안정한 조직이다. 이런 팀에서 업무에만 올인해도 쉽지 않은데 학업 병행이 가능하기나 할까. 또, 성과에 대한 압박을 견뎌낼 수 있을까?


구축한 브랜드 정체성과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만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잘 발전시키고 조직 내에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업무를 담당할 사람이 현재로서는 나밖에 없다. 외부에서 사람을 뽑을 가능성도 없고, 사내에 관련 전문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내가 실무를 담당하면서 팀장 역할까지 잘할 수 있을까?


 당장 2월에 영국의 학교 방문으로 일주일 가량 자리를 우는 것은 가능할 것인가? 팀원으로 자리를 비우는 것과 팀장으로 1년에 3번씩 자리를 비우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2 영국에 가는 기간과 호텔 리모델링을 해외 설계사와의 미팅이 겹칠 가능성이 80% 정도였다.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없었다. 팀장이 되면 학교 방문보다 회사 미팅을 우선시해야  거고, 그럼 자연스럽게 박사 과정과는 작별을 해야  것이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박사를 시작한 이유가 뭐였지? 내가 하고 싶은 분야의 공부를 하고 싶은 , 그리고 어디에서든 통용되고 인정되는 타이틀을 얻기 위함이었다. 팀장은 언제든   있지만,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한 공부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있을까. 결국 지금은 나와 회사가 모두 윈윈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학업 실무를 병행할  있고, 회사 입장에서는 호텔의 브랜드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만들어갈 부서를 안정화시키는 .



윈윈을 위한 결정

고민 끝에 대표이사에게 거절의 의사를 전했다. 물론 이 자리에서 학업 핑계를 대지 않았다. 대신 진솔하게 다양한 프로젝트를 통솔해서 성공시킨 경험만으로 신규 조직을 이끌면서 주어진 업무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벅찰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성공적으로 끝난 프로젝트가 조직에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업무 정상화를 위해 실무에 집중하면서 팀장을 서포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어떨지에 대해 제안했다. 대표이사는 이후에도 팀장 자리를 다시 고민해보라고 2-3번의 기회를 줬으나 나의 결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팀장 자리는 고사했지만, 대표이사는 나와 함께 팀을 세팅하기 위한 밑 작업 준비를 했고, 나에게 팀장 자리에 적합한 사람을 추천하라고 했다. 누가 좋을까. 새로 만들어질 팀은 디자인기획팀으로 현존하는 2개의 호텔과 앞으로 오픈할 신규 호텔의 브랜드 방향성 및 브랜딩 전략,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팀이다.  2013년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호텔의 리모델링을 성공적으로 하는 것이었고, 이 업무에서 우리 팀이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나는 인테리어 디자인도 공부하긴 했지만 해당 업무의 전문가는 아니었다. 나와 함께 일하던 후배 직원 역시 예술을 전공한 사람이지만 인테리어 쪽 경험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팀 탐장으로 적합한 사람은 호텔 리모델링 경험이 있고 인테리어 디자인 및 공사 측면의 이해도가 높은 사람일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호텔 내에서 인지도도 있고 나와 친분도 있고 나이 차이도 조금 있는 사람이 좋겠지? 그렇게 내가 추천한 사람은 호텔 리모델링 업무를 여러 번 한 경력이 있고 현 호텔 입사 전 인테리어 회사에 다녔던 나보다 10살 많은 나이의 한 대리였다.




내가 팀장 자리를 고사한 것에 대해 회사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 좋은 기회를 왜?', '그 자리에 더 적합한 사람은 없을 텐데' 등등. 당시의 나는 힘없는 신규팀이 얼마나 쉽게 와해될 수 있는지, 회사에서 타이틀을 얻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또 사람들이 그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구차해질 수 있는지 등에 대한 생각에 팀장이 되는 것에 무의식적인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가 부족한 부분에서 나보다 경험이 풍부한 선배를 팀장으로 모시면서 서포트하고 좋은 팀을 만들어가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꼭 내 맘 같지만은 않다. 내 추천을 받아 팀장이 된 분은 초반에 브랜딩 업무 파악하는데 시간이 필요했고, 브랜딩 업무 및 사내 교육 관련해서는 내가 전면에 나서서 진행하는 구조였다. 많은 회사 사람들이 우리 팀 팀장을 건너뛰고 나에게 직접 문의하는 일들이 발생했고, 이는 신임 팀장에게도 썩 유쾌할 리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 누적되면서 팀장과 나 사이에는 약간의 서먹함과 불편함이 자리 잡게 됐다.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그때와 같은 결정을 할까? 살면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여러 번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때다. 이런 기회가 얼마나 흔치 않은 기회였는지를 알았더라면 가시밭길이었더라도 베팅을 해봤을 것이다. 훌륭한 팀장이 될 만한 역량이 충분한 상태는 아니라 시행착오는 겪었겠지만, 원래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라고.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고, 배우면서 성장하지 않았을까? 물론 팀장이 되는 길을 택했다면, 결국 공부를 포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비록 약간의 껄끄러움이 있긴 했지만, 내가 추천한 팀장으로부터 분명히 배운 점도 많다. 특히 이 경험은 '내가 팀장이라면 저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를 상상해보면서 팀장의 행동을 비교해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더 특별했다.


다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며 생각하면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하는 아쉬움과 후회가 남지만, 아마도 우리는 매 순간 그 당시의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선택을 한 것 아닐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우리가 지난 일을 망각해서 아쉬움이 남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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