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도, 마음도 모두 비워내기
이렇다 할 상속 재산은커녕 가족들에게 빚만 잔뜩 남기고 간 아버지를 생각하면 이따금 원망과 같은 음습한 감정이 다시 소환된다. 분명 아버지를 땅에 묻고 온 그날, 뇌세포 하나하나에 깊숙이 새겨져 있는 것만 같던 애증과 원망의 감정들도 함께 묻어버리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빚만 남기고 가셨네요.' 아무 대답 없는 아버지의 사진을 노려보며 천륜을 저버린 듯한 혼잣말로 고인을 비아냥대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그저 현실 앞에 이기적이고 간사한 인간일 뿐이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감정들 속에서 아버지의 물건들도 하루빨리 비워내야겠다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그래야 아버지를 미워하는 마음도 싹 비워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버지의 방을 정리하면서 그의 삶을 표현해 줄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에 웃음이 나왔다. 책 속에 몰래 감추어 두었던 유언이 담긴 손편지라던가 아니면 해 묵은 아버지의 일기장 같은 것? 현실로 빛바래 버린 내 감정들을 다시 미화시킬 수 있게 만들어 줄 그런 물건들이 나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낭만적인 드라마는 역시나 일어날 리 없었고 옷 몇 가지, 신발 몇 켤레, 핸드폰, 효자손, 낡은 사진들, 생신 선물로 드렸던 스킨로션 세트(이것도 오래전인데 아직 반도 사용하지 않은), 한동안 사용한 적 없어 보이는 교통카드 등만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아버지의 유품은 너무도 쉽게 고작 두 세개의 박스로 정리가 되었다. 그 단출함에 왠지 모를 미안함과 그와는 달리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내가 한순간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먹먹한 마음에 한숨을 크게 쉬는데 사진 속 아버지는 나를 보며 아무 말없이 그저 미소만 짓고 있었다.
'휴..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람..'
방에서 나와 먼지 묻은 손을 박박 닦고 물티슈를 한 장 뽑아 드는데 순간 멈칫했다. 이 물티슈의 향기가 아버지의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누워 계신 아버지의 손과 얼굴을 이 물티슈로 닦아드렸다. 다른 물티슈보다 두툼하고 향이 은은해 좋다고 하셨던 별것도 아닌 물티슈 한 장이 무방비 상태의 나를 속수무책으로 울리고 있었다.
이 향기가 마치 떠난 아버지의 살냄새처럼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