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글_20150822
“그림을 안 그리고 일을 하고 있다니!”
부산역 안에 있는 특별할 것 없는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과 베리베리주스 한잔을 두고 앉아서 하는 말이다. 봄눈별은 10시 18분 순천행 열차를 기다리며 잠시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는 쉼터에서의 24시간 근무를 마치고 부랴부랴 전철을 타고 오는 길이다. 며칠 전 부산에 공연차 놀러온 봄눈별은 나의 친구이다. 생각다방산책극장이 대연동에 있을 때, 공연을 할 장소를 찾고 있다는 자칭 백수 봄눈별에게 먼저 연락한 것은 우리쪽이었다. 그리하여 기이한 악기들을 가지고 와서 치유음악회를 열었고 처음 놀러왔던 그때 몇일 밤을 자고 같이 먹고 놀면서 인연을 맺었다. 그게 벌써 4년이 지났다. 그런 봄눈별이 오랜만에 나를 만나서 정수리를 콕 찌르는 말을 한다. “왜 그림을 안그려?” 음...그게 말이야...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해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순간 내 입에서 흘러 나온건 말이아니라 변명과 핑계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나무라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부산역에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겨우 10여분. 아침이었으니 커피로 잠을 깨우고 다음에 만날 때는 더 오래 함께 시간을 보내자하며 아쉬움은 다음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이곳에 두자 하였다. 손을 흔들며 그를 보내고 나는 다시 전철을 타고 서대신동으로 갔다. 느닷없이 입원을 해버린 H를 만났다. 기침을 연달아 하더니 검사라도 해보자고 들린 병원에 그대로 입원을 한 것이다. 아마도 기관지나 폐 쪽에 이상이 있다고 한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모습이 낯설다. 같이 산책하고 잠깐 편의점에 들러 군것질을 하고 옆에 있어 주는 것 밖에는 할 수가 없다. 병원비를 턱! 하고 내 줄 수 있을 만큼의 여유도 없는 나의 통장 잔액이 오늘따라 비참하고 허무하다. 낮인데 구름이 몰려오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금방 그칠 소나기 일거야. 다시 해가 나오는 오후, 병원 1층 주차장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S로부터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현정씨 (위로공단)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좋다는 말이 많아요. 아트앤씨어터에서도 하고 영화의전당에서도 하는데 쉴 때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니깐 정보공유^^” 안그래도 병원을 잠시 벗어나고 싶었던 차에 휴대폰으로 영화정보를 보고 상영시간표를 찾아봤다. 3시 40분 아트씨어터에서 상영이 예정되어 있다. 저녁때는 다시 돌아오기로 하고 H의 배웅을 받으며 병원앞에서 113번 버스를 탔다. 정류장에 내려서 10분정도를 걸어야 영화관이 있는 카톨릭센터에 도착한다. 인디라 불리는 비주류(다양성)영화들을 상영해주는 곳이다. 부산에서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귀한 극장들을 좋아한다.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선 극장의 로비는 한산하다. 매표하는 청년은 친절하다. 상영까지 20분정도가 남아서 빈 테이블에 앉았다. 내 뒤쪽에는 혼자 온 여성한명, 앞쪽엔 커플로 추정되는 남녀가 앉아서 함께 극장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음료수 자판기 옆에 원두를 갈아서 뽑아주는 커피자판기가 보여서 500원 동전을 하나 꺼냈다. 아메리카노. 위잉-기계가 움직이고 화면에 “설탕조절“이 빠르게 지나간다. 앗, 놓쳤다. 달달한 아메리카노가 나오겠구나. 할 수 없지. 나는 설탕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 맛을 즐기지 않는다. 음식에도 커피에도 술도 달달함이 느껴지면 바로 머릿속을 스치고 입속을 맴도는 ‘망했다’. 표현을 고쳐보자면 ‘망쳤다’가 더 나의 기분에 적확하게 들어맞을 것이다. 신맛, 짠만, 매운맛, 쓴맛을 다 덮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단 맛이 나는 싫다. 다른 상영작들의 전단지를 살펴보다가 입장을 했다. 티켓을 절단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화면이 정면으로 보이는 중간에서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나의 오른쪽 중간쯤에 한사람이 앉자 출입구의 커튼이 닫히고 불이 꺼진다.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극장을 울린다. 단 두 사람을 위한 상영이 시작되는가? 생각하려는데 아까 내 앞에 앉아 있었던 커플이 조용히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는다. 4명이다. 음산한 숲 속 장면으로 시작되는 <위로공단>. 구로공단, 가리봉, 7,8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했던 일터와 그녀들의 증언으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삼성반도체, 마트, 콜센터, 항공기승무원, 한진중공업 김진숙님, 캄보디아 봉제공장, 이주노동자등 업종만 바뀌었지 크게 개선되지 않은 여성의 노동환경에 집중하며 영화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에게 일이란 무엇입니까? 노동이란 무엇입니까?” 현대 도시에서 나 역시 여성노동자이고, 여성노동자로 살아갈 운명을 빗겨갈 수는 없을 것이고 누구라도 일을 하면서 고민해보아야 할 부분이여서 무거웠다. 영화를 다보고 나왔는데도 밖은 밝았다. 낮에 영화를 보는 것이 좋았다. 극장은 어두컴컴하여 2시간을 영화 속에 쑥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 여전히 해가 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한다. 영화를 보는 것이 끝이 아니라 나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표식처럼 빛이 내 곁에 머무르는 것이다. 영화를 좋아했었어. 극장을 나오면서 갑자기 몸이 들떠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서점으로 가자’ 몇 주 전부터 사고 싶은 책이 있었다. 인터넷에서 사면 10%라도 싸게 책을 구입할 수 있지만 어째서인지 다른 물건은 인터넷으로 잘도 사는데 책만은 그렇게 안되었다. 보고 싶은 책을 클릭해서 결제하고 바로 읽을 수 없이 배송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된다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책은 정가로 서점에서 구입하는 편이다. 많이 사야 한 달에 두 세권인데 나를 위한 작은 사치라고 생각한다. 예술서 코너에서 책의 제목을 찾다가 직원을 불렀다.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인터뷰집이다. 세상의 안부를 ane는 거장 8인과의 대화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당장에 어디라도 앉아서 책을 펼치고 싶었지만 병원에서 심심하게 보내고 있을 H를 위한 시집을 골랐다. H와 만난 지 1년이 되었다. 그 사이 시집을 여러권 선물했는데 싸웠을 때, 서운할 때, 일이 생겼을 때 내말대신 전했던 남의 말이다. 꼼꼼하게 읽지는 않는 것 같아보였지만 오늘도 사고 싶었다. 이기적이고 일방적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저녁이 되어서 다시 돌아간 병원 1층 벤치에 앉았다. H는 시간을 떼우기 위해 개복치 육성게임을 하고 있다. 화면 안에서 먹이를 먹으면 몸이 커지는 것이 게임의 전부이고 유리알보다 약한 개복치의 최종목표는 가장 큰 개복치가 되는 것이다. 그는 손가락 하나로 자주 돌연사 하는 개복치의 사인을 수집하며 포인트를 모아 새로운 먹이를 구입하고 더 살찌우기 위해 계속해서 먹인다. 무한 반복되는 게임의 룰은 단순해서 지겨워보이지만 병원에서의 지루한 시간을 견디기에 적당한가 보다. 크게 움직이지 않으면서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게임 속 개복치를 기르면서 해맑게 웃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