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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작가 Jun 07. 2021

프러포즈 대(실패)작전

적은 늘 가까이에 있다

          

  적은 늘 가까이에 있다. 아무리 치밀한 계획이라 할지라도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인 것. 나의 프러포즈 대(실패)작전은 지인들의 입막음부터 시작되었다.                


   ‘이제 드디어 쏭이 아르헨티나를 갈 수 있겠네!’      


   나를 잘 아는 친구들은 내 결혼 소식을 듣곤 대개 이런 반응이었다. 내가 얼마나 아르헨티나를 가고 싶어 했는지 아는 것이다. 나만큼이나 감격해주었던 친구들. 그런 친구들에게 고마움도 잠시, 신신당부를 전해야 했다. ‘오빠가 아직 모르니까 비밀로 해 줘. 오빠한테 프러포즈로 알려주려구!’ 다행히 친구들은 완벽히 협조해주었다.


  하지만 위험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법. 한 번은 내 친구의 결혼식에 해맑과 같이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차에는 가는 길이 비슷해 중간에 내려주기로 한 친구, I가 타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도중, I가 물었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     


  우리는 일순간 당황했다. 전혀 당황스러운 질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 해맑이 말했다.      


  -저는 아직 몰라요. 쏭이 가고 싶었던 데가 있다고 나중에 말해준대요.      


  I는 흥미로웠던지 자기에게만 얘기해줄 수 없겠냐고 했다. 나는 I에게만 카톡으로 말해주었다. 어디인지 알게 된 I가 해맑에게 말했다.  

   

  -오우! 휴양지는 아니네요.


  또 한 번은, 웨딩슈즈를 사러 갔던 날이었다. 숍에서 구두를 몇 켤레 신어보고 비교하던 도중, 직원 언니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둘 다 주저주저했다. 아,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나... 그러다 내가 말했다. 사실은 내가 나중에 프러포즈를 하며 알려줄 계획이라 아직까지 해맑이 모른다고. 나만 알고 있다고. 직원도 역시 약간의 흥분과 호기심으로 자기에게만 알려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해맑을 몇 발자국 떨어지게 한 다음, 직원에게만 귓속말로 전했다. 직원은 신기한지 이렇게 말했다.      


  -어머 저는 처음 들어본 곳이에요!     


  이런 식의 몇 번의 대화로 해맑에게는 몇 가지의 정보가 생겼다.      


[휴양지는 아님. 12시간 비행. 환승 후 다시 12시간 비행. 직항은 없음. 신혼여행으로 많이 가는 곳은 아님.]      


  친구 N은 이러다가 신혼여행 떠나는 날 알게 되는 것 아니냐며 웃었다. 그러자 해맑은 약간 흥분하며 말했다.      


  -그것도 괜찮겠는데?!     


  급기야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청춘>처럼 어느 날 납치되어서 공항 가는 길에 행선지를 알게 되는 것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하다가, 진짜 그렇게 하게 되었다. 프러포즈 계획과는 노선이 한참 달라졌지만... 그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겠다 싶었다.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정작 당사자만 모르는 신혼여행!

  신혼여행을 세 달 앞두고 나는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해맑은 정말 어딜 가도 상관없는 걸까? 그게 남극이나 북극이어도? 아프리카나 사막 한복판이어도? 이렇게 물어보면 어디어도 상관없다는 해맑. 지구 반대편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겠다는 나나, 어디로 가는지 신혼여행을 떠나는 날 알아도 좋다는 해맑이나... 이래서 우리가 결혼하나 싶기도 하고... 어쨌든 이렇게 친한 친구들의 협조도 구했고, 이제 기습 질문을 받을 일도 끝났다.      






  그 해, 12월의 겨울밤은 바람도 많이 불고 유난히 추웠다. 결혼 준비를 도와주러 온 엄마와 함께 해맑과 나는 망원동의 작은 와인바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얼추 결혼 준비도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고, 가게 안의 따뜻한 공기와 분위기와 와인에 살짝 취해갈 무렵이었다. 해맑의 이런저런 얘기를 듣던 엄마가 말했다.      


  -아이고, 그래서 아르헨티나는 우쩨 갈라고~     


  눈앞이 번쩍했다. 시공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예? 아르헨티나요? 저 아르헨티나 가나요? 아... 아르헨티나가 신혼여행...     

  

  지금 해맑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고 있는 거지?! 잠깐만, 이걸 어떻게... 아, 이걸 어떡해!!!     


  -엄마!!!!!               


  한순간이었다. 한마디였다. 맥이 빠졌다. <꽃보다 청춘>은 개뿔! 심지어 지구 반대편이고 뭐고 가기 싫어졌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프러포즈를 하겠답시고 생난리를 쳤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웨딩슈즈를 사던 날... 친구에게만 카톡으로 알려주던 순간... 친한 친구들에게 당부를 하던 순간... 뿐만 아니라 웨딩플래너와의 자리에서도, 청첩장을 주던 숱한 순간에도 잘 버텨왔는데... 지금까지 잘 넘겨왔는데... 아니, 왜, 지금!!!                

  프러포즈는 해보기도 전에 대실패였다.




          






  -나랑 지구 반대편까지 같이 가줄래?          


  결혼식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행 비행기 티켓을 오빠에게 주었다. 꽤나 감동스러운 순간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가장 느끼한 결혼식 BEST 2’에 링크되었고, 눈치가 빠른 개그맨 오빠들은 ‘그 비행기 티켓 소품은 또 언제 준비했냐? 빵 터졌네’라고 콕 집어 얘기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실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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