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쏭작가 Jun 12. 2021

진짜 신혼 첫날밤

정말로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나요...?



          

  결혼식을 올린 날, 그러니까 사람들이 모두 ‘첫날밤’이라고 부르는 그날, 정말로 뜨거운 밤을 보내는 커플은 몇 커플이나 될까.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설화 중에 ‘신혼 첫날밤, 신부 머리에 꽂혀 있는 실핀 빼다가 날밤 새운다’는 말이 있다. 결혼식을 올리고 나니, 이 말이 가장 현실적인 말이었다. 샤워를 하려고 머리를 푸는데 세상에, 온갖 종류의 실핀들이 머리카락 사이사이에서 나왔다. 이만하면 다 뺐나 싶은데 또 나오고, 또 나오고, 나중엔 팔이 아파서 잠깐 쉬었다가 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새벽 4시에 일어나 1시간을 이동해서 2시간 넘게 메이크업을 받고, 1시간을  이동해서 사진을 찍고, 손님들을 맞이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손님들께 인사하고, 지방으로 내려가시는 어른들을 배웅하고, 결혼식 비용을 처리하고, 가족들과 짧게 인사를 나누고, 호텔에 들어오니 저녁 6. 들어와서 한숨 돌리고, 씻고, 지인들과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나니 저녁 8-9. 나갈 힘도 없어, 룸서비스로 주문한 파스타는 무슨 맛인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머릿속에 퓨즈가 나가버릴 지경이 되는데... 이쯤 되면 나와 마주 앉아 있는  사람, 이제  남편이  남자와  어떤 무엇보다도 먼저 하이파이브를 하게 된다. ,  끝났다! 결혼식  뤘어! 끝났어! 잘했어! 고생했어! 하며. 우리 생에 가장 뜨거운 하이파이브였다.


  그렇게 로맨틱함이라곤 하나도 없이, (결혼식) 첫날밤은 사이좋게 숙면을 취했다.                




  오늘은 결혼식이 끝난 지 한 달이 지난밤, 신혼여행의 첫날밤이다. 보통은 신혼여행에서 다 첫날밤을 맞이하니까, 우리도 그럼 이 날을 첫날밤이라 해볼까. 사실 이제 와서(?) 첫날밤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만은(...) 그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으니까 어떤 멋진 첫날밤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아주 뜨겁거나 거창한 그런 것(?) 말고,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자, 이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건배를 한다든지 그런 것. 이제 부모님 눈치 안 보고 마음대로 같이 여행가도 되겠네, 부부끼리 취미를 가지면 좋다던데 우리는 뭘 같이 해볼까, 나는 취미로 평생 괴롭힐래, 장난치고 꺄르르 숨이 넘어갈 듯이 같이 웃는 그런 것. 실컷 ‘오늘이 첫날밤이야!’하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날에 마음껏 신나고 싶었다. 여기까지가 상상이고,      


  현실은.

  신혼집에서부터 스무 시간이 넘게 이동해 런던에 와서 호텔 방문을 열고 들어오니, 사실 첫날밤이고 뭐고 일단 이 무거운 가방부터 내려놓자! 이 뜨거운 운동화부터 벗어버리자! 이 찝찝함부터 샤워하자! 일단 잠깐 눕자! 이런 생각들뿐이어서 기본적인 컨디션을 회복하는데 온 힘을 썼다.      


  -이제 좀 배고프지 않아?      


  시계를 보니 어느덧 저녁 8시.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났다. 배도 고픈데 잠도 오는 상황. 당장 침대로 뛰어들어서 잠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고 싶기도 했지만, 호텔 근처에 괜찮은 미슐랭 레스토랑을 검색해 두었던 게 떠올랐다. 서둘러 룸을 나섰다.      







  토요일 밤의 런던 거리는 약간의 취기와 흥분들로 들썩거렸다. 런던 중심부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었는데 최근 들어 인기가 많아진 동네라 그런지 거리엔 젊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노랫소리, 취기가 오른 사람들의 환호소리, 그 사이를 지나다니는 차들, 불빛들, 네온사인 같은 것들이 들썩들썩했다. 그 밤엔 사람들이 많은 술집 아무 데나 들어가서 피시 앤 칩스에 맥주만 마셔도 완벽한 밤이었을 것 같다. 내일 밤에 나와서 마셔볼까, 이런 생각을 하며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들어서자마자 조그만 리셉션 공간이 나왔다. 테이블 위에는 작고 환한 램프가 하나 켜져 있었는데, 불빛을 밝힌 곳에 메뉴판이 있었다. 매일 다른 디너 코스요리인데, 오늘의 메인디쉬는 양고기 스테이크였다. 누린내가 나는 양고기는 잘 못 먹는데 괜찮을까 잠시 망설이다가 먹어보기로 했다.


  자리를 안내받아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한 면에 길게 배치되어 있는 오픈 키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예닐곱 명의 셰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음식을 만드는 중이었다. 약간 낮은 조도와 잔잔하게 깔린 재즈 음악, 넓게 트인 홀, 여기저기 식사를 하는 사람들. 실제로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게 맞나, 현실감이 없어질 정도로 신이 났다. 영국 드라마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작고 조그맣고 예쁘게 플레이팅 되어 나오는 음식들을 감질나게 하나씩 먹는데 이상하게 자꾸 하품이 나왔다. 와인을 마셔서 그런가, 몸에 긴장이 풀리고 피가 도는 것 같으면서 배가 불러오니 노곤해졌다. 마침내 오늘의 메인 디쉬, 양고기 스테이크가 나왔다. 칼로 썰어 한 입 먹어봤는데 아뿔싸! 누린내가 난다. 게다가 미디엄으로 구운 스테이크라 조금 더 강하게 느껴졌다. 해맑은 그래도 맛있다고 잘 먹는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해맑은 개띠라서 뭐든 다 잘 먹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스테이크를 썰어보는데... 이번엔 하품이 정말 크게 났다. 레스토랑에서 이러면 실례일 텐데. 급히 눈물을 닦고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눈을 번쩍 떠 보았다. 아이... 그래도 너무 졸리다... 지금 몇 시간을 깨어 있는 걸까... 하아음, 해맑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양고기 스테이크... 이쯤 먹었으면 나는 할 만큼 한 것 같아... 조금 남기고 후식을 달라고 했다.


  하-음, 또 하품.                







  정신을 차려보니 해맑이 내 사진을 찍고 있다.      


  -뭐야~ 뭐 찍었어~     


  빵 터진 해맑. 찍은 사진을 보니, 턱을 괴고 잠에 혼곤히 빠져 있는 내 얼굴이다. 안자는 척하는 사진, 정말 안 자는 척하는 사진, 그러다 잠에 빠져 턱을 괸 손에 한쪽 얼굴이 쭈욱 늘어난 사진까지.     


  -으앙! 이게 뭐야~ 나 안 잤는데~     


  해맑은 웃겨 죽으려고 하고, 나는 졸면서도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라즈베리 맛도 잠을 못 쫓을 만큼 눈꺼풀이 무거웠다.                     


  하---음,                

  




  오늘도 첫날밤은 망했다.         






       

이전 08화 스무 시간만의 샤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