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 라이프에서 ‘애니멀’ 라이프가 되기까지의 여정
# 사람이 사는 집인가, 고양이가 사는 집인가?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39㎡의 작은 집. 방 2개와 거실, 화장실 1개가 있는 우리 집은 성인 2명이 살기에는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경주에서 큰 지진이 있고 나서부터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답시고 (실상은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이사 올 때 상당히 많은 책과 짐을 정리하고 왔다. 심지어 이삿짐센터에서도 2인 가구치고는 짐이 별로 없다고까지 했었던 집이 우리 집이었다.
그런데 두 명에서 ‘2인 + 1묘’가 됐다고 이리도 차이가 클 줄이야. 자잘하게 사들인 고양이 물품들은 집안의 여백을 서서히 차지해나가고 있었다.
“고양이한테 스크래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데.” (이미 여러 개가 있다.)
“할인 행사하네? 어차피 사놓으면 쓰니까 사지 뭐.” (이 얼마나 불필요한 지출인지... 잘 알고 있다. 손가락 단속을 못 할 뿐.)
“이 장난감은 안 사 본 건데? 좋아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취향을 몰라 다양한 종류로 샀다. 지금은 좋아할 것 같은 걸 여러 개 산다. 결국 그게 그거란 소리다.)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은 한정적인데 들어오는 물건은 많아지니 있던 것을 버리는 수밖에.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격이다. 어쩔 수 있나. 쓰지 않는 물건을 무료 나눔으로 내놓고, 처분하고. 나름대로 미니멀 라이프는 포기할 수 없다며 ‘하나가 들어오면 하나를 내보낸다.’는 철칙을 지키려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절대 버릴 수 없는 물건이 있었으니 바로 빈백이었다. 이사를 오면서 고심 끝에 고른 제품이었고 보리가 오기 전까지 1년 정도 우리 부부는 아주 만족하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 녀석이 글쎄 빈백의 맛을 알아버린 게 아닌가? 잠도 빈백에서 자고, 놀 때도 빈백을 향해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가 신나게 노는 걸 즐기다 보니 빈백을 처분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빈백은 보리가, 흔들의자는 부부가 사용하는 것으로 반강제적 협의를 하는 게 최선의 합의점이었다.
빈백 소유주 : 보리
흔들의자 소유주 : 부부 집사 두 명
부부 집사는 빈백의 사용을 원할 경우, 나 보리의 허가를 받도록 한다. 이를 어길 시 츄르 10개를 조공하도록 한다.
“자 여기 서명하세요들.”
아마 고양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을 하면서 서명을 강요할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부부는 절대 반박할 수 없다는 것.
“왜요? 빈백은 부부 집사의 돈으로 산 건데요?”
이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냥, 그렇게 된다. 이유는 없어. 고양이와 함께 살다 보면 자연스레 양보의 미덕과 포기를 위한 용기를 체득하게 된다. 인간의 공간은 더욱더 좁아지고, 고양이의 공간은 더욱더 넓어지게 되는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람 집에 고양이가 얹혀사는 건지, 고양이 집에 사람이 얹혀사는 건지 헷갈린다.”라는 생각이 드는 단계라면, 애니멀 라이프의 길을 걷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잠깐, 눈물 좀 닦고 계속 할게요.)
# 이를 어쩌나, 이제부터 시작인데요?
사실, 지금까진 예고편에 불과했다. 이제부터 본편이 시작하는데 집안 어디든 자유롭게 휘날리는 털과의 전쟁을 치러야 하고, 혹여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 고무줄을 주워 먹을지도 모르므로 서랍 속에 꼭꼭 넣어둬야 하고,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를 놀다가 뜯어 먹을 수도 있으므로 싱크대 하부장 안에 잘 넣어 둬야 한다. 새벽 6시면 알람 울리듯 밥 달라고 울어대고 (주말도 예외는 없다. 당연하게도) 정해진 시간만큼 사냥놀이를 해야 한다. 이것은 현실이고 팩트이다. 특히 기상천외한 것들까지 먹는 고양이들이 분명히 있으므로, 사람이 주의하는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하자면, “이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모-든 부분까지 다 신경 써야 하고 꼼꼼해져야 한다.”는 것. 정말 애니멀 라이프는 미니멀 라이프보다 백배 천배 더 힘들다!
# 애니멀 라이프의 고수가 되기 위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부부를 웃게 만드는 일등 공신이 이 작은 녀석이라는 게 참 다행이고, 또 고맙다. 부부끼리 언쟁이 높아질 때면 조용히 하라는 뜻인지, 이쯤에서 그만하라는 뜻인지, 녀석이 우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목청껏 울어대며 중재자를 자처한다. 냉전체제로 돌입하더라도 매일 밤 녀석의 양치를 해주다가 자연스레 화해하기도 한다.
보리를 입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서운 속도로 퍼진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출퇴근에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되니 기뻤으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외부와의 단절은 사람을 조금씩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에 뼈저린 공감을 했다. 아마 보리가 없었다면 나도 코로나 블루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7시 30분에 집을 나선 남편은 12시간이 지나야 돌아왔으니까. 내가 홀로 보낼 12시간을 지켜준 건 보리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무료할 새’를 주지 않고 알차게, 끊임없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근무시간 동안에는 위험하지 않은 장난감을 거실 바닥 곳곳에 놓아주었고, 일이 끝나면 깔끔하게 정리하고 청소를 했다.
‘이놈의 장난감은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물고기 인형, 소고기 인형, 캣닢 사탕 등등을 하나씩 주워 담으며 구시렁구시렁 거렸다. 치우고 어지럽히고, 아기를 키우는 여느 집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미니멀 라이프는 보리와 함께 하는 동안에는, 당장엔 이루어질 수 없지만 언젠가는 이루고 싶은 버킷 리스트에 고이 담아둔 채로.
제가요, 원래는 미니멀 라이프로 살려고 했는데요, 애니멀 라이프도 해보니까
나름대로 매력적인 삶이더라고요. 그래서 목표를 조금 수정했죠.
애니멀 라이프 ‘만렙’을 찍고 싶어졌거든요. 몸은 힘들고 귀찮지만,
하루도 빼놓지 않고 웃게 만들어주는 솜털뭉치 친구랑 같이 해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