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021년 1월, 2월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겨울이었다. 석 달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길목엔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이고, 치워지고, 다시 쌓이는 것의 반복이었다. 아이들은 오리 모양을 한 눈사람을 만들어 곳곳에 얹어놓았고 경비원 아저씨는 쌓인 눈을 한쪽으로 열심히 쓸어 모았다.
펑펑 쏟아지듯 내리는 눈을 신기한 듯, 창문 너머를 바라보는 보리를 보며 나는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온몸에 털 옷을 입고 있는 녀석들에게도 매서운 겨울바람은 소용이 없었을 거다. 깨끗해 보이는 하얀 눈이 녀석들에게는 날카로운 칼처럼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베이는 것 같은 아픔이 되지는 않았을까.
2021년 1월의 어느 날.
혹독한 겨울이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는 길고양이 집을 치우는 것과 먹이를 주는 것마저도 반대하는 사람과, 뒷정리를 잘하고 있고 최소한 겨울만이라도 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자는 의견이 여러 번 대립했다. 길 위의 작은 생명은,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을 터줏대감은, 아무런 힘없이 쫓겨나야 했다.
보일러가 따뜻하게 만들어준 부드러운 공기를 마시며 생활하는 보리가 다행이긴 하지만, 이 작은 사치조차 누리지 못하는 바깥의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저렸다. 다행히 단지를 벗어난 동네 곳곳에 길고양이들을 챙겨주시는 마음 따뜻한 분들과 TNR까지 해서 돌봐주시는 감사한 분들 덕분에, 몇몇 고양이들은 무사히 겨울을 날 수 있었다.
하얀 눈이 신기해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너를 보며, 차디 찬 눈을 잘 이겨내야 할 또 다른 고양이들을 생각해.
하지만 보살핌이 미치지 못하는 곳의 고양이는 여전히 여러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 위를 살아가야 한다. 모두 품을 수 없기에 애써 발걸음을 돌리지만, 보리와 함께하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세상의 작은 부분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예전에 아이를 낳은 직장 선배가 그랬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남의 아이도 예뻐 보여.”라고. 당시의 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는데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내 아이가 지나온 시절이니까, 방긋방긋 웃는 모습이 얼마나 예쁠지 행복하게 만들어주는지 아니까. 남의 아이도 내 아이처럼 소중한 존재라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고 고양이인 게 다르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 집 밑 화단에는 작년 여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새끼 고양이 2마리와 어미 고양이가 있었다. 대충 보기에 보리가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꼭 그만한 새끼 고양이였다. 둘이서 장난친답시고 엎치락뒤치락하는 게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숨죽이며 훔쳐봤더란다.
굵은 빗줄기가 매몰차게 쏟아지던 여름밤, 새끼 고양이들은 어미를 찾는 것 마냥 애옹애옹, 우렁차게 울어대며 작은 나무 밑에 숨어 있었다.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그칠 줄 모르는 빗줄기에 감기라도 걸리진 않을지 걱정스러운 밤이었다. 우리 집이 1층이라면 비를 피하라고 우산이라도 잠시 가져다 놓을 텐데 그마저도 할 수 없어 마음 아픈 밤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면서 녀석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겨울에는 다시 두 마리가 나타났다. 하얀색 바탕에 검은색 젖소 무늬 녀석과 몸 전체에 검은색 털을 두른 고양이였다. 이전에 잠시 머물렀던 고양이와 같은 고양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두 녀석은 아파트 화단 위를 사람을 피해 거닐곤 했다.
우연히 마주친 녀석.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봄꽃을 느낄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맘때의 고양이들이 얼마나 이쁜지, 어미의 보호가 얼마나 필요한지, 얼마나 잘 먹어야 하는지 이제는 알기에 녀석들에게서 쉽게 눈이 떨어지지 않는다. 길 위를 살아가는 고양이들이, 조금은 더 안전하고 따뜻하게, 그리고 배부르게 삼시 세끼 정도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 평균 3년 남짓한 길 위의 생명과 평균 15년의 수명을 누리는 집고양이의 수명 차이가 조금은 더 줄어들어도 되지 않을까. 작은 소망이지만 사실은 절대 작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포기하진 않을래. 내 아이가 예쁜만큼 남의 아이도 예쁘다는 사실을 나는 절실히 깨달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