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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제 Jun 01. 2024

이 시간을 갭이어라고 부르기로 했다

버티지 않고 멈추기, 다시 시작하기

멈추기를 선택했다. 휴직한 지 두 달이 조금 지났을 때 결심했다. 10년 간의 직장생활을 그만두기로. 이직과 퇴사를 두고 고민했지만, 도저히 곧바로 다시 회사에 다닐 자신이 없었다. 휴직을 떠날 때부터 결국 퇴사를 택할 것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퇴사 이유는 남들과 비슷할 것이다. 내 경우만 특별한 것이 아닐 테고, 나만 유달리 힘든 직장 생활을 겪은 것도, 내가 다닌 회사에만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문제는 나에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퇴사한 이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퇴사한 목적이었다. 일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고 싶었고, 내 일을 해보고 싶었다. 내 삶의 이야기를 스스로 쓰고 싶었고, 더 나은 나로, 가족에게 더 좋은 아빠이자 남편으로 살고 싶었다.


회사 밖에서의 시간은 나를 중심으로 흘렀다.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충실히 채워갔다. 해내고 싶은 마음만큼 남아 있는 에너지는 없었던 걸까. 퇴사한 지 두어 달쯤 되었을 때부터 감정의 기복이 커졌다.


나는 도대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러다가 아무것도 아닌 내가 되는 게 아닐까 깊은 불안감에 빠지기도 했다. 이직을 준비하는 건지, 프리랜서가 되려는 건지, 이 시간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도 혼란스러웠다.




기분 전환을 위해 서점에 들른 어느 날, 내 상황에 딱 맞는 책을 만났다. 잠시 일을 멈추고 자신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보냈거나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책이었다. 다양한 직업과 경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 시간에 대해 한목소리로 말했다. 그 시간은 나만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고, 우리는 아직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만나 보지도 못한 책 속 사람들이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고, 마음속 불안감이 조금씩 사라졌다. 내 선택이 잘못된 게 아닌 것 같았고 나도 그들처럼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책을 덮으며 나는 이 시간을 갭이어라고 부르기로 했다.


갭이어(Gap year)는 “학업을 병행하거나 잠시 중단하고 봉사, 여행, 진로 탐색, 교육, 인턴, 창업 등의 다양한 활동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통해 향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시간”을 말한다. 북미,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쌓는 갭이어를 가진다고 한다.


무한 경쟁 사회인 대한민국의 학생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이다. 나도 대학생 무렵 쉬면서 내 방향을 설정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대학 생활의 대부분도 취업 걱정과 스펙 경쟁에 낭비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고민해보지 못했고, 내 길은 내가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직장인이 된 후에도 내 삶과 커리어의 방향을 고민해본 적이 별로 없다. 나 자신을 위해 일하지도 않았고 남들의 기대를 맞추려 노력하고 남들의 인정을 바라며 일했다. 나를 아끼며 긴 호흡으로 일하는 법도 몰랐고, 나를 중심으로 커리어를 쌓는 법도 몰랐다. 두 회사에 다니며 열 번 가까운 번아웃을 겪었고, 직장인 10년 차가 되었을 즈음엔 몸과 마음을 모두 잃어버린 듯했다.




1년 동안 갭이어를 보내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 지독한 번아웃을 이겨냈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회복했다. 직장에 다닐 때 하지 못한 다양한 경험도 많이 했고 작은 성취도 얻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어떤 커리어를 원하고 어떻게 만들어갈지 충분히 고민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나의 뒤늦은 갭이어’로 부르기로 한 이 시간 덕분에, 앞으로 일이든 삶이든 더 잘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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