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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제 Jul 20. 2024

그리고, 주저하지 말기

퇴사 여행 둘째 날에 든 생각

자리에서 일어나자 상당히 허기가 졌다. 세 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생각에 잠겼기 때문일까. 새 출발을 위한 힘이 필요했던 걸까. 후련한 기분 탓인지 평소 즐기지 않는 매운 음식까지 당겼다.


잠시 찾아보니 바닷가에서 초당 순두부 마을이 가까웠다. 걸어서 금방 도착한 맛집 거리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사람이 꽤 많았다. 고민하지 않고 바로 보이는 줄 없는 한 가게에 들어갔다. 주문하자마자 나온 짬뽕 순두부 한 그릇을 쉴 틈 없이 깨끗이 비웠다. 앞으로는 어떤 일도 주저하고 싶지 않았다.


저녁 기차 시간까지 카페 투어를 하기로 했다. 결심 후에 뒤따르는 문제들에 대해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퇴사일을 언제로 정할지였다. 사실 휴직 기간을 연장하고 소속만 남겨두는 최후의 수단도 있었다. 회사 규정 상 육아휴직은 아이 한 명당 최대 3년 동안 사용할 수 있었다. 이론상 회사에 돌아가지 않고 충분히 계속 내 길을 찾아볼 수 있었다. 몇몇 동료도 회사를 끝까지 이용해야 한다며 나에게 퇴사하지 말고 휴직을 연장하기를 권유했다.


그렇지만 퇴사를 결정한 이상 단호하게 끝을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것 같았다. 구체적인 이유는 없지만 마음을 한 번 정했으니 예정된 휴직 기간 내에 빠르게 퇴사하는 것이 올바른, 그리고 나다운 선택이라고 느꼈다. 다만, 회사 입장에서도 처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 나도 퇴사 관련 여러 일을 처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우선 두 달쯤 후로 퇴사 시기를 잡았다. 한편으로는 며칠이라도 더 일찍 회사와 관련된 모든 관계를 끊어내고 싶었다.


다음으로 가족, 특히 아내에 대해 생각했다. 작년에 아내가 다시 일하고 싶어 한다는 걸 몇 번 느꼈던 게 떠올랐다. 당분간 육아와 집안일을 내가 도맡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마음 편하게 복직을 준비할 수 있게 이번엔 내가 아내를 도울 차례가 되었다. 아내가 복직할 때까지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빠르게 익숙해져야 했다. 4년 넘게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아내. 고맙고도 미안한 아내에게 내 퇴사가 선물처럼 느껴지기를 바랐다.





경포호수 그리고 안목해변까지, 세 곳의 카페에 들러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 일어날 일과 가야 할 길에 대해 생각하는 중, 회사에서 겪은 일들과 함께한 사람들도 떠올랐다. 미안함, 서러움, 억울함, 아쉬움. 울적한 감정이 드는 순간마다 말없는 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강릉역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 뒤에 아무 미련도 남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잠든 아내와 아이들을 보며, 가족들을 위해 더 나은 아빠가 되리라 생각했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보낸 후 아내와 공원을 걸었다. 말하지 않아도 아내의 마음은 내 마음과 같았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같은 곳을 바라보며 우리의 두 발로 걸어 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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