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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작가 Dec 05. 2019

아무 생각 없어도 행복할 수 있어요.

회사 안 가고 동유럽 가기-1

 경유 시간까지 포함해서 15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저녁 일곱 시쯤 오스트리아 빈에 입성했다. 한국에서 10일에 출발했는데 아직도 10일이라는 건 꽤 이색적인 일이었다. 그렇지만 10월의 비엔나의 해는 꽤 짧았다. 짐을 찾고 나오자 해는 이미 저물어 있었다. 그냥 외지도 아니고 생전 처음 밟아보는 땅에 가로등 불빛에만 의지한다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일단 숙소에 가야 했다.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방법을 미리 캡처해 뒀었다. 물론 구글맵으로 검색하거나 숙소 사장님에게 바로 연락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유심을 갈아 끼우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장시간을 비행기에 있으면서도 유심을 미리 끼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건 처음이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땐 그걸 바꿔야 한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터지지 않는 핸드폰을 붙들고 이 기차표가 맞는지, 지하철을 타는 건지 한참을 헷갈려했다. 이십 분이면 갈 것을 장장 한 시간 만에 무사히 한인 민박의 사장님을 만날 수 있었다. 한국어로 대화할 대상이 있다는 게 새삼 고맙게 느껴졌다. 방을 배정받고 숙소 규칙을 들은 뒤 바로 잘 준비를 했다. 시차 적응은 약 삼 일간 네 시간밖에 안 잔 사람한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었다. 이미 누워있던 다른 여행객과 잠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바로 잠들었다. 다음날, 오전 일곱 시에 일어나서 조식을 먹고 숙소를 나섰다. 




상큼한 첫날



그랬더니 이렇게 파스텔 톤의 예쁜 건물이 맞이하고 있었다.

아 도착했구나, 유럽!  잘 왔구나 빈! 그제야 비엔나의 공기가 와 닿았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일단 비엔나에서 유명하다는 데는 다 둘러보기로 작정한 날이었다. 숙소와 가까웠던 벨베데레 궁전 상궁을 돌아본 후 쇼핑 거리라고 불리는 케른트너 거리로 향했다.





어떤 할아버지 옆에 앉아서 가만히 사람 구경했던 시간.



 케른트너 거리에 도착하자 '여긴 정말 큰 도시구나.' 체감했다. 사람들은 분주했고, 나와 같은 여행객들도 많았다. 물론 단체 관광객도 많았다. 우리나라와 달리 길 중앙에 테라스가 마련돼 있는 가게들이 많았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자유롭게 대낮부터 맥주를 마셨다. 아니 아침부터 마셨던 것 같기도 하다. 그니까 낮밤 가리지 않았다. 마음에 들었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 지나가는 것도 구경하고, 가진 경비는 빠듯했지만 괜히 MANGO나 ZARA에 들어가서 아이쇼핑도 하고, 생애 처음으로 외국 푸드 트럭에서 핫도그도 사 먹으면서 콜라를 맥주로 바꾸는 데 진을 빼다 보니 금세 오후가 됐다. 모든 것이 생경해서 가는 걸음걸음마다 사진 찍을 것 천지였다.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액자를 들여다보는 아주머니부터, 그저 록시땅을 지나가는 비엔나의 직장인일 것 같은 사람들까지 모조리 핸드폰에 저장했다.

  한국에서도 혼자 종종 여행하고, 밥 먹고, 영화 보고, 전시 가는 것을 어렵게 하지 않아서 그런지 비엔나에서도 혼자는 즐거웠다. 발이 닿는 모든 곳이 새로웠기에 즐거움이 더 컸다. 물론 영어 패치가 안 되어 있어서 누군가와 대화해야 할 때마다 작아지는 건 피할 수 없었지만,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사고 싶은 물건을 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대부분 'this one, please' 나 'thank you'로 해결했다. 




저 가게, 탐난다.






 낯선 곳을 누군가와 거닐면 행동 하나하나에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가고 싶은 가게를 당당히 들어갈 수도 있다. 잘 맞는 친구와 함께라면 더 즐거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혼자 있을 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내키는 대로 쓸 수 있다. 같이 있는 사람과 내가 공통으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타협해야 하는 게 아니라, 오로지 나만을 위한 선택으로 1분 1초가 채워지는 것이다. 난 그런 시간을 좋아했다. 누구에게도 내 시간을 내어주지 않아도 되는 시간. 

 한국에 있을 때 머릿속 한쪽에는 늘어지면 안 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퇴사한 이후의 삶을 즐겼다고 여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비엔나에 오고 나니 그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구글 지도를 보느라 집중하는 시간도, 영어를 할 때 긴장하는 시간도,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을 담기 위해 카메라를 켜는 시간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없어도 반려견과 함께 드나들 수 있는 예쁜 카페에 앉아 있던 시간도, 모두 아무 생각 없이 보냈지만 그 자체로도 온전히 내 삶이 된 날이었다.


동유럽의 첫날,

빈에서의 첫날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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