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장편 소설 부활 프로젝트
나의 장편 소설 부활 프로젝트
유학할 나라를 일본으로 선택한 것은 현실적인 여건 때문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은 대학원 입학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꽤 많았고, 입학 자격을 갖추기까지 거의 일 년의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내 마음은 이미 하던 일과 한국을 떠났는데 당장 행동에 옮길 수 없는 상황에 가습이 답답해졌다.
그러다가 우연히 나의 학부 전공과 거의 유사한 일본 게이오 대학의 미디어 디자인 대학원을 발견하게 되었다. 대학생 때부터 틈틈이 일본어를 공부해 두었고 프로듀서 일을 하면서 업무차 자주 일본 출장을 다녔기 때문에 일본 생활에 적응하기도 쉬웠다. 게다가 미국이나 유럽의 대학원보다는 준비해야 할 것도 상대적으로 간소했다. 그래서 바로 이곳이다 생각하고 입학 준비에 돌입했고 운 좋게도 합격했다.
그런데 십 년 이상이 지난 지금, 그때를 회상해 보면 전형적인 도피 유학이었다고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만 해도 나는 대학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냥 학사 졸업하고 취업 안되면 일단 들어가는 곳? 왜 필요한지 전혀 알 수 없는 석사 학위를 따러 가는 곳으로 여겼다. 그렇게 아무런 이해도 없이 단지 현재의 갑갑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 하나로 유학을 떠났으니 영락없는 도피 유학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 내 인생에 미칠 영향력의 크기를 상상도 못 한 채, 그저 합격했다는 소식에 마냥 들떠 있던 어느 날,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아버지가 후두암 2기에서 3기 사이라는 것이다. 그때가 11월쯤이었고 일본으로 떠나기 대략 4개월 전이었다.
직장을 관두고 유학 생활을 위해 남은 기간 동안 일본어 공부와 대학원 공부를 준비하려던 나의 계획은 처음부터 크게 틀어졌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다음 해 3월까지 집과 병원을 오가는 강행군이 이어졌다. 아버지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무엇이 되려고 할 때는 모든 것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반대로 안되려고 할 때는 모든 것이 어그러지는 세상의 이치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아버지는 암진단을 받은 후 대략 한 달 반이 지났을 때 서울삼성병원의 실력 좋은 의사 선생님에게 두 번의 수술을 받았다. 첫 번째 수술은 목 안의 후두 부근에 암세포가 퍼진 부위를 잘라내는 수술이었고 두 번째 수술은 목 근육의 일부를 잘라내고 뒤집어 암세포 부근을 긁어내는 수술이었다. 수술 후 아버지의 목은 몇 겹의 헝겊을 실로 꿰매 덧댄 것 같은 봉제 인형처럼 변했다. 어쨌든 아버지는 2차례의 수술을 잘 마쳤고, 우리 가족은 큰 고비는 넘겼다고 안심했다.
그런데 이후부터 하나둘씩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수술 후 방사선 치료를 4~6주간 해야 하는데 서울삼성병원에서 할지, 고향으로 내려가서 해야 할지 선택해야 했다. 방사선 치료는 통원치료 형태만 가능하기 때문에 본가인 창원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산, 창원, 진해를 합치면 대략 인구가 100만이 넘는 큰 도시인데 방사선 치료를 할 수 있는 병원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가 2009년이었는데 설마 아직도 그렇지는 않겠지? 창원 인근의 진주에 있는 경상대 병원이나 부산의 대학 병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진주보다는 부산에 가는 길이 조금 더 편할 것 같아 창원과 가장 가까운 동아대 병원을 선택했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는데 방사선 치료에 관한 것이다. 수술을 잘 받기 위해 창원에서 서울로 왔듯이 방사선 치료도 서울의 대형병원에서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서울에 머물며 삼성병원에서 방사선 치료까지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생각으로는 어차피 방사선 치료라는 것은 기계가 특정 부위에 방사선을 쏘는 것이니까 어떤 병원에서 하든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치 엑스레이 사진을 6주간 찍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서울의 대형 병원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방사선 치료가 4주째쯤 진행되었을 때 무적 괴로워했고 의사에게 잠시 치료를 중단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는데 담당 의사는 자신은 지금까지 방사선 치료를 한 번도 중간에 중단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그대로 6주까지 마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내가 옆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는 아니라 뭐라고 의견을 보탤 수는 없지만, 공교롭게도 아버지는 6주간의 방사선 치료가 끝난 바로 다음날 폐렴에 걸려 응급실로 이송되었고 그 길로 중환자실에서 대략 5주간 입원한 후 돌아가셨다.
중환자실 입원 후 3~4일 동안은 담당 의사가 차도를 기다려 보자며 우리에게 자세하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줬지만 이후에도 폐렴약의 효과가 나지 않자 의사도 슬며시 포기하는 눈치였다. 폐라는 장기의 특성상 처방 약이 듣지 않으면 병원에서도 더 할 것이 없었다. 약이 듣지 않는 이유는 6주간의 방사선 치료로 면역력이 저하되어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만 할 뿐 뭘 더 알아보거나 조사해보지는 않았다. 진실을 알게 된다고 한들 변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중환자실은 면회가 오전, 오후 각 한 번만 허용되었다. 어머니와 나를 포함한 가족들은 아침에 창원에서 출발해 부산 동아대 병원 중환자실에 도착한 뒤, 대기실에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가 잠이 든 아버지의 얼굴을 두 번 보고 창원으로 돌아오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말은 안 했지만 입원 후 일주일이 지났을 때쯤, 나는 아버지가 회복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버지의 죽음이 가시화되자 미뤄 두었던 현실적인 문제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시 중환자실은 의료보험 혜택을 제외하고 대략 하루 25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들었다.
의사는 한 주가 지나자 더 이상 우리 보호자들에게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았고 우리는 창원에서 부산을 매일 왕복하는 생활을 얼마나 더 지속해야 할지, 아버지가 얼마나 더 중환자실에서 호흡기를 달고 누워 있어야 하는지 예상할 수 없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심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체력적으로도 서서히 무너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위중하다는 상황 자제도 힘든 일이었지만 닥쳐오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까지 수면 위로 떠 오르자 극심한 우울감에 시달렸다.
아버지는 그래도 자식의 유학 길은 막고 싶지 않으셨는지 대학원 학기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에 운명하셨다. 모든 죽음은 안타깝지만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따라 슬픔의 밀도와 강도는 달랐다.
우리 가족은 모두 아버지의 죽음을 입원 초기부터 예상했고 운명하시는 날까지 슬픔과 비통한 심정을 매일 조금씩 나눠서 느꼈다. 슬픔의 총량은 같아도 그것을 하루에 조금씩 나누자 마침내 돌아가신 날의 충격은 처음 암진단을 받았을 때에 비해 크지 않았다.
그렇게 대학원 입학 합격 통지를 받은 날부터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이르기까지 정신없는 4개월을 보냈고 나는 그렇게 몸과 마음이 누더기처럼 해진 상태에서 도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의 첫 해 유학생활은 암울하지 않을까 하는 불길한 예감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훨씬 더 지독한 다음 해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던 그때의 심정은 후일 나의 첫 단편 소설집 '아무도 모르는 악당'에서 '다리 위에서 어떤 마음이었을까'로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