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장편 소설 부활 프로젝트
세상의 모든 감독은 무척 되기 어려운 존재다. 야구나 축구 같은 스포츠팀의 감독도 그렇고 영화, 드라마, 뮤직 비디오와 같은 대중문화 콘텐츠의 감독도 그렇다. 이유는 너무 간단한데, 감독은 딱 한 명만 필요한데 되고 싶은 사람은 너무 많아서다.
등단 작가 친구에게서 천명관 소설가의 존재를 듣고 인터넷에서 그에 대해 검색해 보니, 인터뷰 몇 개만 보고도 대충 상황이 짐작됐다. 나는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했지만 영화계와는 어느 정도 인력이 공유되었기 때문에 그쪽 바닥에 대해서도 들은 바가 많았다.
천명관 작가는 영화판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을 시작했고 아마 최종 목표는 영화감독이었을 테지만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감독 지망생은 넘쳐나고, 감독이 될 기회는 양적으로는 적고 데뷔하는 과정은 분명하고 명쾌하지가 않다.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던 천명관의 재능은 소설가로서 꽃을 피웠는데 이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시나리오를 잘 쓴다고, 영상 연출을 잘하는 것은 아니고, 이야기를 잘 풀어간다고 해서 소설을 잘 쓰는 것도 아니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각 작업 간에는 미묘한 경계가 있고 나름의 뚜렷한 정체성이 있다.
내가 애니메이션 업계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는 대학생 때 애니메이션 프로덕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제작팀의 시나리오 회의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TV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에 내가 만들어간 이야기가 채택되기도 했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은 나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소설이란 것이 참 미묘한데, 이야기가 정말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다. 비슷한 예를 들자면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이야기가 제일 중요하긴 한데 영상미라는 것이 있어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이 영상 문법에 맞고 세련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소설은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데 글이라는 도구, 또는 방식에 어울려야 한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능력과는 또 다른 자질이다.
문제는 이런 사실들은 나중에 시간이 한 참 지나서야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친구에게서 천명관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이라는 차이만 있었을 뿐, 천명관과 나는 굉장히 비슷한 경우라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오해를 했다.
각 장르와 결과물의 구현 방식에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이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노트북 한대만 있으면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소설이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 나도 해보겠노라고 작가 친구에게 선언을 했다.
원래대로라면 그 시기에 석사 논문을 시작해야 했지만 전반기 내내 어머니 병간호로 대학원 프로젝트에 성실하게 참가하지도 못했고, 논문을 쓰려고 하루 종일 다른 논문을 뒤적이며 읽어 보아도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상태였다.
알 수 없는 불안함이 팽배했고 그 불안감을 떨쳐 내기 위해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싶은데, 정작 가장 중요하게 해야 할 일에는 집중이 안 되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작가 친구의 이야기는 잠시 일탈하고 싶었던 나를 매우 강력하게 유혹했을지도 모르겠다.
작가 친구가 한국에 돌아간 후, 나는 그동안 애니메이션 프로듀서를 하면서 나중에 장편 영화로 제작해 보겠다고 생각해 둔 스토리 아이디어를 적어 두었던 노트를 오랜만에 서랍에서 꺼내 뒤적였다. 뭔가 소설로 쓸만한 것이 있는지 검토해 보다가 이내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생각해 둔 소재는, 타임머신, 초능력자, 판타지 같은 것들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이런 이야기는 소설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인식 속에 소설이란 김동인의 감자,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최근 작품을 생각해도 조정래의 태백산맥 같은 것들이었는데, 나의 소재는 소설이 되기에는 너무 황당무계하고 현실성이 없었다.
그렇다면, 소설 같은 소설 소재를 생각해 보자고 한동안 궁리를 해보았지만 뭔가 위대한 소설이 탄생할 것 같은 그런 아이디어가 좀처럼 떠 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지지부진 시간만 흐르다가 어머니 병원 문제로 다시 한국으로 귀국할 일이 생겼다.
병원 관련 일을 보고 일본으로 나를 찾아왔던 작가 친구의 집에 방문했다. 그리고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소설로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해 두었거나 생각나는 아이디어는 소설이 되기에는 죄다 리얼리티가 없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당시 작가 친구가 나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의 책장에서 소설책을 한 권 꺼내 읽어 보라고 나에게 건네줬다. 당시 가장 상금이 큰 세계일보 문학상 수상작이었는데 요즘은 이런 이야기도 문학상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친구가 건네준 소설은 임성순 작가의 컨설턴트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단체로부터 의뢰를 받아 목표 대상을 완전 범죄로 죽일 수 있는 완벽한 암살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일을 했고 그 직업을 컨설턴트라고 불렀다.
그 소설은 재미도 있었지만 동시대의 소설 장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감이 없었던 나에게 아주 좋은 참고가 됐다. 지금이야 드라마, 영화, 소설까지도 대중이 판타지적인 설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만 내가 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었던 2010년도에는 그런 변화의 움직임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하지만 당시 나의 인식 속에서 소설은 순수한 문학이었고,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소재가 황당해도 그냥 재미있기만 하면 되는 그런 대중적인 장르라는 나름의 엄격한 구분이 있었다.
친구가 소개한 소설 컨설턴트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암살 시나리오 구성 작가라는 소재가 순수 문학의 소재로 쓰일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을 만들어 주었다. 또한 소재가 다소 판타지적이라도 충분히 진지하고, 깊은 의미를 지닌 수준 높은 산문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사례를 제시한 것이다.
소설 제목 그대로 나에게 딱 맞춤형 컨설팅이었던 것이다.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트북 한대만 있으면 된다는 말에 호기롭게 소설 집필을 시작했지만 차츰 에너지가 바닥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멈추기 직전이었던 나의 소설 집필 작업은 다시 연료를 보충하고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