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장편 소설 부활 프로젝트
소설을 쓰기 위해 꼭 현실적이거나 사실적인 소재만 다루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례를 본 뒤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때부터 소재와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 콘텐츠 제작 업계에 있을 때, 반드시 제작해 보겠다고 생각한 이야기는 시간여행에 관한 것이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이 세계에 대한 모든 과학적 탐구 영역 중에서도 시간여행이 가능할지가 제일 궁금했다. 그래서 한때는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원리나 천체 물리학에서 블랙홀에 대해 꽤 진지하게 공부해보기도 했고, 나름의 결론을 얻어 내기는 했다.
젊었을 때는 정말 궁금했는데, 나이가 들어 더 이상 궁금하지 않거나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 두 가지 관심 사항이 있다. 하나는 ‘신은 없다’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 여행은 불가능하다’이다. 소설을 쓸 무렵에도 시간여행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리고 있었지만 호기심 많던 십 대 시절, 나의 무모하고 순수했던 열정을 끈끈하게 잡아 두고 있었던 시간여행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소설의 큰 소재를 시간여행으로 정해 놓고 난 다음에는 어떤 스토리를 시간여행에 엮을지 결정해야 했다. 완전 SF나, 꽤 복잡한 대하드라마를 쓰기에는 첫 소설 작업이라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게다가 대학원 졸업을 위해서는 석사 논문이 더 시급한 일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할 것 같은 거대한 이야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는 것이, 나중에 소설가들의 인터뷰를 많이 찾아 읽어 보았는데 대부분 그들의 첫 작품은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는다고 했다. 직접적인 자신의 경험담일 수도 있고 픽션이 많이 가미되었을지라도 기본적으로는 자신의 경험이 이야기의 주요한 소재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첫 장편 소설을 쓴 뒤, 다음 작품을 내기 어려운 이유가 전업 작가로 전념하기 어려워 장편 소설을 완결할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것이 큰 이유이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처음 장편 소설을 쓰는 것까지는 가능했는데, 다음 작품에서부터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 이상의 이야기를 써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저런 고민 끝에 가벼운 연애 소설을 시간여행에 담아 보기로 결심했다. 당시만 해도 연애와 사랑에 대해 관심과 열정도 많았던 어린 나이(?)라 플롯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당연히 내가 남자니까 주인공은 남자였고, 여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캐릭터를 잡아가다 보니 어느새 그냥 나의 이상형이 탄생해 버렸다. 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여성의 행동,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여성의 외모, 내 주변에서 인기 많았던 여자들의 특징 하나하나를 모두 모아 모자이크처럼 붙여 놓은 완벽한 여신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자 중요한 문제가 발생했다. 나의 이상형에 가까운 여주인공이 인간 세상의 찌질하고 유치한 연애와, 오해와 갈등이 뒤 얽힌 사건 사고에 휘말리는 상황이 잘 상상이 안 가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그런 이상형에 가까운 여성과 교제해 본 적도 없거니와 그냥 단순한 친구 관계인 여자들도 주변에 많이 없어서 소설 속 인물들이 상황,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지 잘 감이 안 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캐릭터는 만들어졌지만 스토리가 진행이 안 됐다.
초보 소설가가 처음 마주하는 장벽이었다. 그렇게, 진행되지 않는 스토리에 고민하다가 결국 결단을 내렸다. 내가 잘 모르는 캐릭터는 포기하자.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살 것 같은 여주인공에게 소설의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역할을 맡기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설정이었다.
하지만 나의 이상형을 소설에서 아예 없애 버리는 것은 아까웠고, 소설 속에 등장은 하지만 직접적인 화자로 등장하는 장면은 극도로 줄이고, 항상 주인공이 멀리서 바라보고 짐작할 수밖에 없는 인물로 바꾸기로 했다. 대신 이야기의 진행은 현실 속에서 내가 잘 아는 주변 인물을 섞어 높은 조연들에게 맡겼다. 그렇게 설정을 바꾸니 스토리가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직접 만나기 어려운 캐릭터를 소설에서 마저도 비중을 낮추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내가 창조하는 세계에서조차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그렇게 못내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마침내 타협안을 생각해 냈다.
스토리 진행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소설 제목에 반영하기로 했다. 그래서 결정된 나의 장편 소설 제목이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찾아 헤맨 나날들”이다. 여기서 스테파네트라는 이름은 알퐁스 도데의 별에 나오는 인물이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는 교과서에도 실린 작품이었는데 요즘은 예전만큼 유명하지는 않은 것 같다.
도데의 소설 ‘별’에서 양치기 소년은 주인집 아가씨 “스테파네트”에 대해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데, 양치기 소년은 경험도 없고, 나이도 어려 그 감정이 무엇인지 본인도 잘 모른다. 양치기 소년에게 스테파네트는 매우 낯선 존재였고 자신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유형의 인물이었고 당연히 그녀에게 신비감과 호기심을 갖는다.
양치기 소년에게서 스테파네트의 존재는 내 소설의 남주에게 같은 느낌이지 않을까 싶어 제목을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찾아 헤맨 나날들”로 지었다. 사실 이 제목에 대해서는 주변의 의견이 엇갈리긴 하는데, 출간될 소설의 제목을 결정하는 건 다음 회에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암튼 그런 식으로 나의 애정이 담긴 캐릭터의 비중은 줄이지만 소설 제목에 압축해서 표현해 놓고 나니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작자의 행복과 기쁨이라 정말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