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재원 Apr 13. 2024

응급실과 장편 소설

나의 장편 소설 부활 프로젝트

이제 장편 소설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 나에게 몰아닥쳤던 불행의 최고 절정기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일본 대학원 유학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고 본격적으로 연구에 매진하려던 2학년 1학기 초, 한국에서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골반 뼈가 부서졌고, 매우 위중하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하네다 공항으로 가서 예약 취소된 항공권을 구해 급하게 찾아간 진주 경상대 병원 응급실. 불행 중 다행히 레커차바퀴가 어머니의 복부 밑 엉덩이 쪽을 밟고 지나갔기 때문에 생명은 부지하셨다. 바퀴가 조금 더 위로 올라와 복부를 밟고 지나갔으면 장 파열로 그대로 즉사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들었다. 


천운으로 생명은 건졌지만 골반뼈가 부서져 침대에 계속 누워 계셔야 했고 대소변도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응급실의 담당 의사는 젊은 의사였다, 요즘 의사 파업 때문에 자주 듣는 그 ‘전공의’를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그 의사가 던진 한마디 때문에 이제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다. 


젊은 의사가 말하길 어려운 수술을 해야 하고 자신의 가족이라면 서울의 대형 병원으로 가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자식 된 도리로 서울로 이송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연히 서울로 가겠다고 결정했다. 그때만 해도 병원의 환자 이전 시스템에 대해 전혀 몰랐다. 


사설 응급차를 불러 어머니를 태우고 진주에서 서울로 달렸다. 바로 이전 해에 아버지가 암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던 서울삼성병원으로 향했다. 서울삼성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더니 당직 의사가 간이침대에 누워 있는 어머니를 보고, 나에게 어떻게 다쳤는지 물어보았다. 그러고는 이 정도의 환자는 더 작은 병원에서 수술할 수 있으니 다른 곳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삼성병원에서는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순간 정신적으로 패닉 상태가 왔다. 경상대 병원에서는 어려운 수술이라고 서울로 가라고 했는데 정작 서울에 왔더니 다른 병원에서도 할 수 있는 수술이라고 하니 누구 말이 맞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삼성병원에서는 절대 받아주지 않을 태세였고, 나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진주에서 같이 왔던 응급차 기사가 근처에 있는 강남세브란스로 가보자고 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나에게 응급차 기사의 제안은 한줄기 빛이었고 바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강남세브란스에서는 다행히 어머니를 응급실에 입원시켜주었고, 이런저런 검사와 간단한 치료를 하고 난 후, 조금 후에 입원실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나는 진주에서 같이 왔던 응급차 기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비용을 지불했다. 


그렇게 응급실에서 입원실로 옮겨 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담당 의사가 오더니 어머니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가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삼성병원에서는 처음부터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강남세브란스는 모든 검사를 다 하고 입원실로 옮길 예정이라고 했는데, 갑자기 환자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삼성병원과 강남세브란스는 같은 이유로 어머니와 같은 환자는 받지 않는 것이 정책이었던 모양인데, 강남세브란스에서는 실무를 보는 의사들이 그런 병원의 정책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아직도 어떤 기준으로 환자를 받고 안 받는지는 모르겠고, 병상이 없다면야 어쩔 수 없는 문제지만 강남세브란스에서는 분명 입원이 결정되고 대기 중에 있었는데 갑자기 못 받겠다고 하니, 지금도 뭐라고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억울한 심정이었다. 


게다가 다른 병원을 소개해주는 것도 아니고, 자정이 넘었는데 무조건 나가라는 것이었다. 자정이 넘었고 지방에서 올라왔으니 내일 아침에 다른 병원으로 가겠다고 해도 안된다고 차갑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골반뼈가 부서지고 허벅지 살이 움푹 파인 환자를 무조건 새벽에 퇴원하라고 하는 병원의 몰인정함에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다. 


오래전에 지방 의대 정도는 지원할 수 있는 수능 성적을 받았을 때, 세상을 잘 모르고 뭔 대단한 일을 하겠다고 이공계에 입학했던 나 자신에 대해 처음으로 바보 같은 놈이었다고 스스로 자책했다. 나중에 다른 일로 알게 되었지만 응급실은 4시간 안에 퇴원과 입원을 결정해야 되기 때문에, 입원 불가로 판정된 마당에 아침까지 어머니가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내가 모르는 의료업계의 관행이나 현실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는데, 아무튼 이때 경험으로 아직도 강남세브란스에 좋은 감정이 없다. 지방에서 온 응급차도 이미 떠났고, 강남세브란스에서 다른 병원으로 이전시켜 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에게 수소문한 결과, 용산에 있는 중앙대 병원으로 다시 이송했다. 


다행히 용산 중앙대 병원에서는 어머니를 받아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중앙대 용산 병원은 삼성병원이나 강남세브란스 보다는 급수가 낮은 병원이었다. 그래서 받아주었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어머니가 중앙대 입원실로 옮긴 시간이 새벽 4시쯤이었다. 


어머니가 중앙대 병원에 입원했던 때가 4월 초였고 그해 9월쯤에 고향인 창원의 작은 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 사이 나는 일본과 한국을 수시로 오가는 생활이 반복되었고, 무슨 일도 제대로 집중할 수 없는 상황에 점점 지쳐갔다.  


어머니가 목발을 짚고 이동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 나는 일본으로 완전히 돌아가 석사 논문을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쳐있었고, 대학원 프로젝트 팀원인 일본인 멤버들과의 관계에도 미묘한 긴장감이 생겼다. 


매일 무기력한 생활을 반복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친구로부터 일본으로 여행을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친구는 유명한 문학잡지의 공모전을 통해 정식으로 등단한 작가였지만 그때의 나는 그의 이력에 대해 아무런 감흥이 없었고, 그게 대단한 것이라는 인식 자체도 없었다. 


나의 집에서 일주일을 머물게 된 친구는 대뜸 나에게 물었다.


“왜 잘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늦은 나이에 유학을 온 거야?” 


친구의 질문에, 나는 투자를 받아서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었지만 결국 투자를 받지 못해서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찾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의 대답을 듣더니 친구는 이런 말을 했다.


“너랑 비슷한 소설가가 있어. 천명관이라는 작가인데 영화계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고 늦은 나이에 소설가로 등단해서 지금 아주 잘 나가는 소설가로 성공했어. 애니메이션은 큰돈을 투자받아야 한다며? 그런데 소설은 노트북 한대 있으면 쓸 수 있는데 너도 한번 해봐”


그의 말은 당시 몸과 마음이 몹시 지쳐있던 나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 주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고 그렇게 나의 장편 소설 집필이 시작되었다. 

이전 03화 고난은 쉽게 끝나지 않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