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진이 동석의 만두 가게를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세진이 창문 너머로 가게 안을 요리조리 살폈지만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가게 한쪽 벽으로 나있는 조그만 문이 열렸고 동민이 양손을 털며 나왔다. 동민은 가게 앞에 서 있는 세진을 발견하고는 사무적인 느낌으로 만두 살 거냐고 물었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세진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학원에서 보았던 여자들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이 기억난 것이다.
“그쪽 인간들한테는 만두 안 판다고 했을 텐데?”
세진은 삐딱한 동민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응답했다.
“만두 사러 온 거 아니거든요”
동민은 세진의 대응에 약간 무안해졌다. 세진의 미소가 무슨 의미인지도 헷갈렸다. 싸움의 당사자였다면 무슨 개소리냐고 한바탕 퍼부었겠지만 직접 시비가 붙은 사이도 아니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애매한 기분이 들었다.
“사지도 않을 거면 가게 앞에서 왜 얼쩡거려요? 장사 방해하지 말고 얼른 갈 길 가세요”
“그쪽 형을 보러 왔어요. 김동석 씨 맞죠?”
“형? 형을… 요?...”
세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동민은 가늘게 뜬 눈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끗 보았다.
“형은 집에 갔는데 조금 있다 와요. 정확하게 언제 올진 몰라요”
동민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의사 표시로 뒤돌아서 냉장고 문을 열어 이것저것 식재료를 꺼냈다. 세진은 등을 돌린 동민에게 30분 안에는 올 것 같냐고 물었고 동민은 뒤돌아 보지도 않고 무성의하게 ‘네에’하고 대답했다. 잠깐 동안 말없이 동민을 지켜보던 세진은 가게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동민은 하던 일을 멈추고 홱 돌아 짜증을 냈다.
“거 참 귀찮게 하네. 또 뭐요?”
동민의 짜증에도 세진의 미소는 그대로였다. 세진은 검지 손가락만 편 채 주먹을 쥐고 왼쪽 편을 가리켰다.
“저기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형 오면 유한학원 강사가 기다린다고 말해줄래요?”
동민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참. 전 만두 계속 사 먹을래요. 대신 배달은 안 시키고 직접 사 갖고 갈게요. 그럼 됐죠?”
세진이 카페로 향하려는 순간 동민이 세진을 불러 세웠다.
“잠깐만. 그때 학원에서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는데 혹시 얼마 전에 형이 대신 차 빼준 사람 아니에요?”
“기억해요? 보기보다 기억력 좋네요”
“보기보다? 무슨 의미예요?”
“제가 만난 잘생긴 남자들은 모두 기억력이 별로였거든요”
세진은 슬쩍 웃어 보이며 다시 검지 손가락으로 왼쪽 편을 가리킨 후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민은 멍한 표정으로 세진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
세진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반쯤 마셨을 때 동석이 허둥지둥 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카페는 그리 크지 않아 동석은 금방 세진을 발견했고 볼에 엷은 홍조를 띤 얼굴로 세진의 자리로 다가갔다. 동석은 테이블 맞은편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다시 일어섰다.
“저도 마실 것 하나 주문하고 올게요”
“전 다음 수업 때문에 금방 일어나야 해요”
동석은 세진의 만류에 아쉬운 듯 자리에 앉았다.
“동생한테 들었어요 20분 전쯤에 가게로 저를 찾아왔었다고?”
“네. 그날 동생분한테 만두 주문했을 때 저도 같이 있었거든요. 그날 일로 미안한 기분이 들어서요…”
“그 이야기라면 더 이상 하지 마세요. 우리가 잘못했고 그쪽에서 화를 낼 만해요”
“하지만 동석 씨한테 권혜영 선생님이 그렇게 매몰차게 대한 것도 나쁜 일이에요.”
동석은 세진의 말에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고개만 끄덕이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저라도 동석 씨한테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번에 운전 대신해 준 것도 있고 해서 보답으로 밥을 살게요”
“네에?”
동석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듣고 카페 안의 모든 사람이 들을 정도로 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세진도 동석이 그렇게 까지 놀라는 모습에 당황했지만 살짝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석이 대답대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세진은 핸드폰을 꺼내 동석의 전화번호를 물었다. 세진은 동석의 전화번호를 입력한 후,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수업 때문에 이만 일어나게요. 자세한 일정은 제가 전화로 연락드릴게요 괜찮죠?”
동석은 세진의 물음에 그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진이 카페 문을 열고 나간 후 동석은 세진의 빈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석의 시선은 카페 안을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
밤 9시가 넘어 동석은 영업을 끝내고 가게를 정리하느라 분주했다. 동민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벽에 기대앉아 핸드폰 액정화면 위의 엄지 손가락을 아래위로 반복적으로 움직였다. 동석은 동민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앉았다.
“제대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야?”
“돈 벌어서 따로 나가 산다고 했잖아”
동민은 동석의 얼굴을 외면한 채 귀찮은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만 쳐다보았다.
“평생 이렇게 살아? 부모자식 인연이 그리 쉽게 끊어지는 줄 알아?”
“잠깐…”
핸드폰 화면에만 얼굴을 파묻고 있던 동민이 무엇인가 짐작 가는 것이 있다는 듯 동석을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노려 보았다.
“혹시 내가 돈 못 벌게 해서 집 못 나가게 하려고 그렇게 비협조적이야?”
동석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
“안 그러면 왜 그렇게 삐딱한데? 내가 천만 원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기껏 이백만 원만 달라는데”
“도대체 이백만 원은 어디다 쓸건대?”
“영업직이니까 양복도 한 벌 맞춰야 되고, 활동비도 필요하다고”
“양복은 내 거 입으면 되고, 활동비는 왜 니 돈을 써? 회사 일이면 회사 돈을 써야지?”
동민은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고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마. 제대로 차려입고 있어 보여야물건을 팔 거 아냐. 사람들이 얼마나 간사하고 어리석은 줄 알아? 물건도 사람 보고 팔아준다고. 게다가 활동비 지원해 줄 정도면 크고 좋은 회사 아냐? 대학도 안 나온 놈을 그런 큰 회사가 써 주기나 한데? 형도 대학 중퇴하고 할 일 없으니까 이깟 병신 같은 만두나 팔고 있는 거 아냐? 나랑 별 다른 것도 없으면서 뭐가 그렇게 잘나서 세상 다 아는 것처럼 말해?…에잇…”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던 동민은 테이블 위의 핸드폰을 집어 들고 가게 문을 난폭하게 열고 나가버렸다. 따라나서려던 동석은 호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진동을 느꼈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였지만 뭔가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여보세요?”
“동석 씨 핸드폰이죠. 이세진이에요”
동석은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잡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네. 안녕하세요”
“가게 끝났어요?”
“이제 마치고 집으로 가려던 참입니다”
“안 끝났으면 만두 사서 집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래요? 지금 오시면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하하. 아니에요. 이번 주 일요일 낮에 점심 어떠세요?”
“점심이요? 네 괜찮습니다”
“학원 앞에서 12시쯤 볼까요?”
“네 그렇게 하죠”
“그럼 일요일에 봬요.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어요. 그럼 끊어요”
동석은 전화가 끝나고 나서도 손에 쥔 핸드폰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일부러 가게까지 찾아와서 밥을 산다고 했으니 단순히 인사치레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렇게나 빨리 전화가 올 거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동석은 세진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저장하고 서둘러 가게를 나와 긴 쇠고리로 철제 셔터문을 힘차게 끌어내렸다. 셔터 내리는 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경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