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동안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몸을 씻고 단정히 머리를 빗어 출근했습니다. 지문을 찍고 컴퓨터를 켜고, 오늘 내게 주어진 일을 게으름 피우지 않고 해 왔습니다. 상사의 침 튀기는 핀잔도 들어야 했고 승승장구하는 후배를 보며 마음이 무너지기도 했습니다. 우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같이 울며 출근한 적도 있었고, 내 아이는 방치해 두고 남의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내 이름이 블라인드에 올라가 난도질당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몇 년째 승진에서 누락되는 굴욕도 견뎌야 했습니다.
때로는 칭찬도 받고 좋은 기회도 얻었습니다. 개인 생활을 모두 포기하며 회사를 삶의 전부로 여겼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자존감이 무너지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 상처받고 주저앉고 싶었던 일들도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잘 견뎌왔습니다.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끝없이 변하고 특별한 재능 없이 두리뭉술하게 살아온 나는 내세울 것이 점점 더 없어집니다.
예전에는 영어를 잘하는 것이 능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향평준화되어 누구나 잘하고, 번역 프로그램이 격차를 더 좁혀줍니다. 한때는 강의를 잘하는 것이 저의 능력이었습니다. 이제는 말솜씨보다 영상 자료를 잘 만드는 것이 더 큰 능력으로 평가받습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잘하는 것도 나만의 장점이었지만, 이제는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으며 점점 까칠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감이 떨어집니다. 잘하고 싶지만 더 어려워집니다. 새롭게 올라오는 세대들은 최신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냅니다. 50대를 넘어서며, 글이나 말이 바로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눈으로 들어온 정보가 머릿속에서 종합되어 의미를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지금까지는 잘 숨겨오고 있습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던 시절에는 한마디만 들어도 모든 상황이 파악되었습니다. 그때 핵심을 간파하지 못하고 엉뚱한 소리 하던 선배들을 속으로 무시했던 것도 같습니다.
첫 10년은 톡톡 튀는 엉뚱함과 창의성으로, 그다음 10년은 내가 최고라는 자만심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다음 10년은 울화통 터지는 일들 속에서도 하루하루 가시방석 같았습니다. 대단히 잘 나가고 승승장구하지 못했지만 정직하게 부딪혀왔고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이 나이에 매일 신발 끈 묶고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많은 일들을 겪고도 죽지 않고 살아낸 것만으로 나는 대단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겨우 눈을 뜨고 몸뚱아리에 물칠을 했습니다. 푸석한 얼굴에 싸구려 화장품으로 위장을 했지만, 향수만은 샤넬 No.5를 고집합니다. 지하철을 내려 축 쳐진 발걸음으로 겨우 사옥 앞에 도착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띵하고 열리는 순간 마술에 걸리듯 표정은 밝게 목소리는 높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능력 있는 팀장인 척 코스프레를 시작합니다. "잘하고 있다. 나는 멋진 팀장이다." 자기 최면도 겁니다.
퇴근하고는 하루의 순간들을 긁어모아 글을 씁니다. 오늘도 잘 버텼습니다.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정말 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