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부터 꿈이 없었다.
장래희망을 적으라고 하면 그때그때 떠오르는 대로 교사, 간호사, 의사 등을 적곤 했다. 간절히 뭔가 되고 싶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되고 싶은 게 없으니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입사시험을 위해 공부는 했지만, 내 삶을 관통하는 원대한 꿈같은 것은 없었다.
물 흐르듯 살아가는 것, 그게 내 인생의 지론이었다.
한때 자기 계발서에 빠졌던 적이 있다. 그 책들은 이렇게 말했다. "꿈꾸는 대로 이루어진다." "간절히 바라면 기적처럼 이루어진다." "목표를 설정하고 끊임없이 추구하라." 하지만 내겐 아무리 생각해도 되고 싶은 것이 명확하지 않았다. 부자가 되고 싶다든지,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막연한 바람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삶이 구체화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삶 자체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적 호기심은 있었다. 무엇이 되고 싶지는 않아도, 알고는 싶었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었고, 호기심에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았다.
지구별 여행자.
내가 스스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이다. 여행자처럼 다양한 경험을 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잠시 지구별에 머물다 떠나는 사람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어쩌다 보니 한 회사에서 30년을 근무하게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어공부를 하며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공공기관에 원서를 넣으러 간다고 했다. 별생각 없이 "나도 넣어볼까?" 하며 따라갔다. 시험은 5과목 정도 치렀고 면접까지 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친구는 떨어지고, 나는 합격했다.
직장생활은 쉽지 않았다.
당시 직장에는 고졸 출신들이 많았는데, 대졸 여직원인 내가 입사하자 견제가 많았다. 특히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 성격 덕에, 내 할 말을 다 하며 선배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입사 3년쯤 지나 회사에서 어학연수 코스가 생겼다. 3개월 정도 토익 학원에 다녔고, 전국에서 토익 성적 1등을 하며 미국으로 6개월간 연수를 다녀오는 기회도 얻었다.
한 직장에서 30년을 다녔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공무원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오래 다닐 수 있지' 의아해한다. 하지만 내겐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꿈이 없었으니까.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보니, 그만둘 이유도 딱히 없었던 것이다. 물론 하루하루는 열심히 살았다. 맡겨진 일에는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성실히 살다 보니 어느새 30년이 흘러 있었다.
친구 중 한 명은 13번이나 직장을 옮긴 사람이 있다. 공무원, 일반회사, 사업가, 교육자, IT기업, 미국 회사, 중국 회사 등 다양한 경력을 거쳐, 지금은 어엿한 대표이사로 자리 잡았다. 그는 늘 내게 이렇게 말한다.
"더 열심히 살아야지. 성장해야지!"
나는 늘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 너는 열심히 살아서 스페셜리스트가 돼라. 나는 제너럴리스트로 남을게"
나는 지금까지도 특별한 무엇이 된 적은 없지만 앞으로도 무엇이 되겠다고 욕심을 부릴 생각도 없다. 내 직업을 굳이 분류하자면 제너럴리스트. 특별히 잘하는 건 없지만, 주어진 것은 뭐든 다 해낼 수 있는 사람.
돌아보면 직장에서 다양한 역할을 해왔다.
회계, 총무, 통역, 의전 담당, 비서, 인사팀장, 레크리에이션 진행자, 영어 강사, 건물 관리자, 사회자, 리더십 강사, 교육 담당자, 비상 관리자, 소방 관리자, 안전 관리자, 청소년 관리사, 사회복지사, 평생교육사, 요양보호사, 홍보 기획자, 모금 관리자, 행사 기획자 등등. 한 가지에 능통하지는 않았지만, 맡겨진 모든 것을 해냈다.
그렇다면 회사 밖에서 나는 무엇이었을까?
엄마, 딸, 아내, 친구, 식물 수집가, 타로 상담가, NLP 프랙티셔너, 자원봉사관리사, 라이프 코치, 독서 모임 회원, 스콘 전문가, 고양이 집사, 미니멀리스트, 명상가, 브런치 작가, 그리고 지금도 또 다른 무언가로 변신 중이다.
나는 특별히 무엇이 되려고 애쓰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꿈이 없어도 괜찮았다.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으며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았다. 제너럴리스트로서 다양한 역할을 해내며, 그 자체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물론 힘든 일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충분히 가변적인 존재라는 인식은 고통을 이겨낼 수 있게 했다.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는 건, 어쩌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라는 뜻일지도 모른다. 특별한 꿈 없이 살아도 삶은 충분히 의미 있고 다채롭다. 나는 오늘도 지구별 여행자로서 또 다른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
Brunch Book
월, 화, 수,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