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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Dec 25. 2024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날

나이에 대해

한참 센티멘탈했던 사춘기 시절, 나는 밤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일기를 적었다.

일기장 한가운데엔 이런 글귀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스무 살까지만 살게 해 주세요."
열일곱 살 소녀에게 스무 살은 어떤 의미였을까? 더 이상 순수하지 못한 나이, 세상에 때 묻은 어른으로 살아가기보단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여겼던 나이. 그 소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줌마는 서른도 살아냈고 마흔도 살아냈단다. 지금은 백 살까지 살 계획이라고."


나이 들어가는 것은 육체적으로 쇠잔해지는 과정이지만 동시에 정신적으로 강해지는 과정이다.
몸이 약해지는 만큼 정신마저 약해졌다면, 인간은 오래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예민하고 유약했던 나는 스무 살이 되었고, 학교 안에 갇혀 있던 흑백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진짜 세상을 만난 것이다. 사춘기에 적었던 그 소원, "스무 살까지만 살게 해 주세요"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는 행복한 줄도 모르고 행복했고, 힘들 필요 없는 일로 괜히 많이 힘들어했다. 인생의 봄날 같은 나날들. 그러나 끊임없이 타인의 인정과 칭찬에 목매었고 진정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깨어진 사랑의 말들은 유리 조각처럼 심장에 상처를 내었다. 나의 이십 대는 행복하고 기쁘고 아프고 상처받으며 무지갯빛 인생이었다.



서른이 되자, 축제는 끝난 줄 알았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나는 더 이상 아름다운 여자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늘 부족하고 모자란 존재라고만 느껴졌다. 서른이면 충분히 어른이 될 거라 믿었는데, 돌이켜보면 철딱서니 없던 나이가 바로 서른이었다. 목숨보다 소중한 아이들이 생기고 나자, 나 자신의 삶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더 좋은 인생이 한참 남았으니 포기하지 마."



마흔 앓이를 심하게 했다. 마흔이 되는 해에 몸도 마음도 많이 아팠다. "더 이상 젊지 않다. 이제는 중년인가?" 하는 생각에 슬퍼졌다. 나이 먹을 만큼 먹었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에게 휘둘렸고, 분노를 참지 못해 싸우고, 분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늙어가는 내가 불안했다. 마흔의 나에게도 말하고 싶다.
"그날의 너는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충분히 즐겨."



오십은 그냥 지나갔다. 사십 대 후반에서 오십 초반까지는 마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 것 같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오십 하고도 몇 해를 더 먹었다. 이제는 아이들도 독립했고, 직장에서도 자리가 잡혔다. "나 자신으로 제대로 살아봐." 세상이 판을 깔아주는 느낌이다. 그런데 여전히 철들지 못한 내가 있다.

제대로 살아봐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지 두 달, 글을 쓰고 나니 인생이 더 진해졌다.
살아온 시간들이 마음속에 다시 새겨지는 느낌이다. 내 삶은 내 글이 되었고, 내 글은 나의 역사가 되었다. 글을 쓰며 나는 울고 웃었다. 힘들었던 일을 글로 쓰며 위로받았고,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글로 쓰며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만하면 잘 살아왔다고 칭찬해주고 싶은 삶이라는 것을.



나이가 들면서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넓어졌다.
예전에는 결점투성이인 내가 싫었다. 못났고 뚱뚱하고 볼품없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괜찮다. 예쁘지 않아도 괜찮고, 뚱뚱해도 괜찮다.
타인의 단점보다 장점을 발견하는 법을 배웠고, 나 자신에게도 관대해졌다.

특정 대상에 대한 사랑은 줄었지만 세상 전반에 대한 사랑은 늘어났다.
후회와 걱정을 줄이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데 집중한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은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마음을 쓴다.

타인의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하던 때를 지나 보며 일희일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시간이 흐르며 깨달았다. 인생은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고, 나 자신도 결점투성이지만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과거의 나는 때로는 흔들렸고, 때로는 상처받았지만 그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소녀였던 내가 성숙한 어른이 되기까지, 나는 수많은 실수와 아픔을 통해 삶의 깊이를 배웠다.

이제는 마음이 흐릿해지는 만큼 더 넓어졌다.
나는 여전히 배워가는 중이다. 더 나은 내가 되는 법, 더 깊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이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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