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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Dec 24. 2024

불타는 순간, 무엇을 챙기시겠습니까?

며칠 전 주말, 보리차를 끓이다 깜빡 잠들어버렸어요. 집안 가득 매캐한 냄새에 놀라 벌떡 일어났을 때는 이미 냄비가 새카맣게 타버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상태였어요. 정신없이 가스불을 끄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지요. 그 순간, 십몇 년 전 집에 불이 났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어요.



화염 속에서의 대피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시절, 빌라 아래층에서 불이 났어요. 불길은 복도를 타고 올라와 우리 집까지 위협했고, 집 안과 계단은 순식간에 유독가스와 새카만 연기로 뒤덮였지요. 숨조차 쉬기 힘든 상황에 머릿속이 하얘져버렸죠.


그때였어요.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시커먼 소방관이 우주복 같은 장비를 입고 도끼를 든 채 나타났답니다. 매캐한 연기  한가운데 갑자기 등장한 그를 보는 순간 괴상한 우주괴물처럼 보였답니다. 불보다 더 무서운 괴물을 보고 나도 모르게 고함을 빽 질렀다. "앗! 뭐예요!"
"당황하지 마시고 수건에 물을 적셔 입을 막고 나오세요!" 소방관의 차분한 목소리가 정신을 들게 했고, 나는 아이들과 함께 옥상으로 대피했어요.



옥상 위, 소중한 것들을 안고


유독가스를 뚫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길은 쉽지 않았답니다. 손으로 난간을 더듬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랐어요. 옥상에는 이미 빌라 주민들이 다 모여 있었죠. 모두들 급히 챙겨 나온 소지품을 하나씩 들고 있었답니다. 할머니는 자다 깬 듯 베개를 끌어안고 있었고, 한 아주머니는 소중한 추억이 담긴 앨범을 들고 있더군요. 누군가는 007 가방을, 또 누군가는 식사를 하다 왔는지 숟가락을 들고 온 분도 계시더라고요. 저마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본능적으로 챙겨 온 것 같았어요.


당시 나는 핸드백을 메고 있었고, 아이들을 살펴보았어요. 큰아들은 묵직한 돼지저금통을 꽉 껴안고 있더군요. 1년 동안 용돈을 모아 온 아들의 자랑이었어요. 딸은 작은 손에 금빛 메달을 꼭 쥐고 있더군요. 초등학교 1학년이던 딸은 그해 젓가락으로 콩 옮기기 대회에 출전해 대상으로 메달을 받았거든요.
"너에게 가장 소중한 게 이거야?"
"응, 엄마." 단호하게 말하더라고요. 생애 첫 메달은 딸에게 금보다 귀한 보물이었나 봐요.



불이 준 교훈


다행히 불은 금방 진압되었어요. 양초에서 시작된 불길은 소방관들의 빠른 대응 덕에 옆집으로 번지지 않았다고 해요. 대피했던 주민들도 각자의 물건을 들고 자기 집으로 내려갔답니다.


그날 이후 나는 많은 생각을 했어요. '위급한 순간, 우리는 무엇을 가장 먼저 챙겨야 할까?' 베개나 숟가락은 아닐 테지요. 중요한 것은 나와 아이들의 생명, 그리고 각자가 간직한 소중한 기억들이더군요.


위급한 순간, 우리는 무심히 지나치던 것들 중 진짜로 소중한 것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불타는 상황 속에서도 돼지저금통을 끌어안던 아들의 손, 금메달을 놓지 않았던 딸의 얼굴은 내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알려주었답니다.


그리고 오늘, 또다시 끓이던 보리차가 불씨가 될 뻔했던 아찔한 순간을 통해 나는 다시금 다짐했습니다. 진정 소중한 것을 잃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하는 마음과 작은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을. 건조한 날씨와 불조심의 중요성은 물론이고, 우리 삶에서 꼭 지키고 싶은 것들을 다시 한번 돌아봐야겠습니다.


소중한 것은 늘 곁에 있지만, 그것을 잊지 않고 지키려는 마음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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