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혼자일 수도 있지

집 근처 카페에서 간단하게 맥주 한 잔

by 디디

딱히 약속은 없지만 누구와도 약속을 잡고싶지 않은 날이 있다. 바쁘게 달려 온 한 주인 만큼 이 주가 끝나고 다시 시작해야하는 일상이 팍팍할 것만 같다는 기분에 얼마 전에 갔던 카페를 찾았다. 집에서도 먼 거리가 아니어서 금방 버스 한대를 슝 타고 십 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곳이었다.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생각보다 내부도 너무 예쁘고 넓어서 감탄했는데, 음료도 빵 종류도 다양히 많이 팔고 있었다. 수제 잼이나 청 같은 걸 팔기도 하고. 잼과 청이 진열되어있는 진열장을 보고 있으면 다양한 색깔에 조그만 병 안에 담겨있는 잼들을 하나씩 조금씩 맛보고 싶다. 무화과 잼 부터 얼그레이 잼 까지. 집에서도 잼을 만들려고 했던 적이 있는데 생각보다 맛이 놀랍지 않아서 조금 실망했었던 기억이 났다. 엄청난 것을 바랐던 건 아니었지만. 기대라는 건 결과가 무엇이든 실망하게 만든다. 내가 기대한 것 이상이 아닌 이상.


여하튼 또 생맥주를 한 잔 시켰다. 그 때는 그냥 생맥주를 시켰지만 이왕 혼자인 오늘같은 날은 좋아하던 걸 먹고 싶어서 블랑 생맥주를 시켰다. 시키고 나서야 생각난 건데, 여태 블랑은 생맥주로는 먹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병이나 캔으로만 먹을 줄 알았지.

KakaoTalk_20181228_175239226.jpg 반이나 먹고 급하게 찍은 블랑1664 생맥주. 나초가 같이 나온다.

음악을 들으며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글을 쓰고 있자면 오늘은 내가 여기서 제일 여유로운 사람이 된 것 같다. 하고싶은 걸 하며 먹고싶은 걸 먹는다는 것.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들. 나는 이렇게 혼자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때면 귀에 꼭 이어폰을 꼽고 있는 편인데 랜덤으로 재생시켜놓은 플레이리스트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하던 걸 멈추고 가사에 집중한다. 좋아하는 부분의 가사가 나오면 괜히 흥얼거리면서.




나는 뭐랄까 요 근래 힘들었다. 끝났다고 생각한 것은 끝나지 않았고 시작했다고 생각한 것은 아직 도입부조차 알지 못했음을 알고 나니, 그간 해온 것들이 부정당하는 기분이라서. 그런 와중에 읽고싶었던 책을 반도 읽지 못해서. 아침에 버스를 연달아 두 대 모두 놓쳐서, 집에서 나오는 길에 보았던 강아지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아서, 어제 동생에게 모질게 말했던 것이 떠올라서, 엄마에게 투정부렸던 일이 떠올라서. 너무 당연한 순간들에 후회가 쌓이기 시작하니 풀어낼 방법이 없었다. 결국 모든게 쌓여서 커진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는 말하라고 다그치는 입장이면서도 내 감정 하나 스스로에게 말하지 못해서 헤메고 있음을 나는 너무도 잘 알았다.

나는 종종 나의 생각이나 감정을 무시했다. 그런 건 나에게는 너무 익숙해서 마치 빨래가 다 마르면 걷어놓는 것 처럼. 그리고 그렇게 빨래를 걷어서 차곡차곡 개어놓기보다는 여기저기 흩어놓는. 나는 내가 무시한 내 감정과 생각을 다 마른 빨래처럼 마음 바닥에 널부러뜨려 놓곤 했다. 구깃구깃 주름이 지는 줄은 모르고. 그렇게 둔 내 마음은 나중에 입으려고 보면 구깃한 주름과 덜 마른 물 냄새만 가득했다. 그 때는 다시 보아도 어쩔 줄을 모르고 구겨진 옷을 손에 쥐고 다시 자리에 드러누웠다. 슬픔마저 외면하고 싶어서.



맥주 한 잔을 다 비워갈 때 즈음 주변 사람들의 고민이 떠올랐다. 다음 시험은 어떡하면 좋지, 하는 고민부터 시작해서 내일 저녁에 나는 뭘 먹지 하는 고민까지. 그리고 그런 고민들에 답장을 해 주려다가 손을 내려놓고 남은 맥주를 비웠다.

오늘 저녁은 나만 들여다 봐야지. 미뤄둔 옷들을 빨아서 다시 탁탁 널어놓아야겠다. 섬유유연제도 내가 좋아하는 향으로 잔뜩 넣고. 만약 비가 내리더라도 얼른 걷어서 건조기에 한 번 돌리고 마음 한 구석에 건조대를 펴고 차곡차곡 널어야겠다.

혼자여야 하는 날이 있는거지. 오늘처럼.


2018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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