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너무 다른 사람들이라

봄베이하이볼, 사와, 레몬 맥주- J와 선술집에서.

by 디디

J와는 근래 자주 붙어다니게 되었다. 어디부터 왜? 라는 물음이 있어도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사이. 그러나 굳이 묻지는 않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남들이 보면 이상한 사이라고 종종 말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싶다. 어차피 사람 사이라는 건 알다가도 모르고, 모르다가도 알 것 같은 사이니까.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는 관계는 세상에 많지 않으니까.

J와는 나이차이가 꽤 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잘 통한다. J와 대화를 할 때면 어제 먹은 저녁 메뉴 이야기만 해도 즐거워지는 기분이 든다.

어제 저녁에는 라멘을 먹었는데 역시 양이 안 차더라. 먹는 양 줄인다더니? 그게 쉽게 되니. 줄이는 건 잘 안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대화는 어제는 뭐 먹었어? 에서 시작해서 오늘은 뭐 먹을까? 로 종종 끝난다. 하지만 대화가 잘 통한다고 해서 우리의 관심사가 비슷하다는 건 또 전혀 아닌 것이, J와 나는 책 읽는 취향부터 확 갈린다. 나는 굳이 찾아읽지 않는 SF장르를 사랑하는 J와, 그는 좋아하지 않는 한국소설을 즐겨 읽는 나. 우리 둘이 책 이야기를 하면 슬프지만, 그 대화들은 공기 위를 겉돈다. 또 J는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편인데 나는 생각보다 편식도 많이 하고 입도 짧아서 우리 둘이 뭔가를 같이 먹으러 가면 꼭 J는 내 몫까지 먹어 '너무 배부른' 상태가 된다. 가끔 입을 가리고 끅 하고 트림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괜히 콩 때리고 싶어진다. 정말 가끔.

어제도 별다른 일 없이 함께 집에 가다가 갑자기 맥주 한 잔이 생각나서, J가 집에 가져다놓을 와인을 한 병 사고는 술을 마시러 가자고 했다. J는-저녁 먹은 게 양이 안 찼는지- 조금 싫다고 버티다가 결국 순순히 그의 집 근처 술집으로 향했다.

아기자기한 실내 디자인이 예뻤다.

여기는 '선술집'이라는 이름의 가게인데 같은 라인에 '선술집' '선술집2' 이렇게 붙어있어서 프랜차이즈인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같은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가게였다. 같은 가게니 아니니 하는 별 시덥잖은 논쟁을 벌이던 J와 내가 고민고민하다가 그래도 구관이 명관, 이라며 '2'가 붙지 않은 곳을 먼저 들어갔는데 자리가 꽉 찬 채였다. 생각해보니 토요일 밤 열한시 쯤이면 다들 한창일 때니까. 그런데 자리를 안내해주시던 사장님이 갑작스럽게 문 밖으로 나가시더니 한 가게 건너 있는 선술집2로 안내해주셨다. 우리의 시덥잖았던 논쟁은 거기서 그냥 뚝. 하고 끝.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사람들이 꽤 북적였다. 우리 테이블이 들어오자마자 자리가 꽉 찼다. 가게 내부가 좁은 편인데도 와글와글한 소리가 들려 뭔가 싶었더니 옆 테이블이 아주 시끄러웠다. 술을 좀 많이 하셨구나.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J는 다급하게 뭐 먹을까? 뭐 먹고싶댔지? 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이건 J와 지내며 느끼는 건데 그는 화제를 전환하는데 있어서는 어색한 달인이다. 달인인데 어색하다는 말이 붙는 것 자체가 웃기지만. J는 메뉴판을 천천히 보다가 뭐 먹고싶냐고 한번 더 물었고 나는 야끼소바를 먹자고 했다. 나는 원래 면 류를 즐겨먹는 편은 아닌데 이상하게 이자카야만 오면 그렇게 볶음면이 먹고 싶더라. 분위기 탓인가. 사시미류도 많았지만 J가 딱히 먹고싶어 하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간단하게 야끼소바를 하나 시켰다. 여담이지만 내가 여태 먹었던 야끼소바중에 제일 맛있었던 건, S와 갔던 이자카야의 야끼소바. 달큰하고 짭조름해서 너무 과하지도 않고 심심하지도 않았던. 양배추가 많이 들어있어서 좋았던 야끼소바.

한참을 고민해서 메뉴선정을 하고 나니 술은 뭘 시켜야 할지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가, 쓴 술은 원체 싫어하는 J덕분에 하이볼을 시키기로 했다. J와는 전에도 한 번 이자카야에서 하이볼을 먹은 적이 있는데 그 때 먹었던 하이볼은 산토리 하이볼-이자카야 하이볼을 시키면 가장 기본적으로 나오는 하이볼-이어서 새로운 게 없을까 했는데 봄베이 하이볼이 있었다. 봄베이 사파이어. 병이 예뻐서 한 번 바에서 스트레이트로 먹은 적이 있는데. 최악. 향수를 한 입에 꾹 머금은 느낌. 그래서 좀 고민하다가도 토닉워터 들어가고 다른 게 섞이면 괜찮겠지 싶어 봄베이 하이볼을 두 잔 시켰다. 라임이랑 유자로.

앞쪽이 유자, 뒤쪽이 라임

술을 시키고 기다리는데 J는 뒤쪽을 보라며 고갯짓을 했다. 아쉽게 사진은 찍는 걸 까먹었는데, 술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바로 술 디스펜서 같은 데서 술을 따르는 기계가 있었다. 병을 거꾸로 꽂아두고 술을 딸깍 딸깍 손잡이를 눌러 내리는. J에게 우스갯소리로 나중에 저거 사 달라며 졸랐지만 J는 굳이 병 두고 먹으면 되지 사야 하냐고 했고, 물처럼 마시고 싶으니까. 하고 받아쳤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술이 먼저 나왔는데 잔이 너무 예뻐서 와, 하고 감탄을 한 번. 유자도 라임도 상큼하게 맛있는데 미묘한 차이가 매력적이라서 감탄. 사실 나는 라임이 더 내 스타일이었지만 유자에서 술 냄새가 더 난다는 J의 말에 내가 유자를 먹기로 했다. J는 사실 술을 못할 뿐만 아니라, 술을 즐기는 타입은 아닌지라. 그와 대화를 하다 보면 우린 이런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에서도 안 맞는 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술을 잘 하진 못하지만 즐기는 편이라 사실 정도 없이 술을 먹는 경우도 꽤 많은데 J는 취하는 느낌이 싫어서 술을 마시고 싶지 않다고. 나는 내가 취한 그 순간이 좋은데. 취했을 때만 할 수있는 말이 있는 것도. 물론 비겁하지만.

우리가 술을 두 모금 쯤 마셨을 때 야끼소바가 나왔다. 소바 위에 올려진 후라이의 노른자가 반짝반짝 거렸는데 아무래도 나는 맛있는 음식을 잘 찍어내는 사진사는 아닌 모양이다. J는 항상 내가 찍어놓은 사진을 보며 핀잔을 준다. 좋은 핸드폰 가지고 사진을 이렇게밖에 못 찍냐며. 그러는 자기는 얼마나 잘 찍나 봐야겠다 싶었는데 실제로 그가 나보다 훨씬 사진을 잘 찍어두었기에 할 말은 없었다.


나는 가끔 잎으로 우려내는 차(茶)가 술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얼음이 들어있는 술과 차는 우려내는 온도와 마시는 속도에 따라 향이 조금씩 변하고, 나는 변하는 순간순간의 다른 맛들이 좋아서 종종 차를 마시기도 하는데 얼음이 들어간 술도 비슷하다. 얼음이 녹기 전의 맛과, 얼음이 녹고 나서의 맛이 다르니까. 진하다가 서서히 옅어지는.

나는 종종 차를 마실 때면 차의 온도가 사랑의 온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뜨겁게 우려내지만 서서히 식고, 알게 모르게 변해 버리니까. 식은 차의 온도를 견딜 수 없어서 전자레인지에 데워 보거나 뜨거운 물을 더 부어보기도 하지만 예전같진 않은 것 처럼. 뭐든 뜨거운 게 가장 좋은 건 아니지만 뜨거울 때의 기억과 느낌은 강렬해서 그 때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을 우리는 종종 하곤 하니까.


우리는 야끼소바를 야금야금 먹으면서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했다. 나오는 노래들을 들으면서. J는 본인이 좋아하는 노래가 나올 때마다 들썩거리며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 장난삼아 그만해 정 떨어지니까, 하고 이야기했는데 그는 그 다음부터 움찔거리기만 하고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기에 부르라고 했더니 내가 정 떨어진다고 해서 망설였다고 대답했다. 작게 웃으며 안 떨어져, 하고 대답하자마자 J는 기다렸다는듯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서로 노래를 좋아하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했다. J는 의외로 멜로디만 듣는다고 했다. 멜로디가 좋은 노래는 다 듣는다고. 가사보다는 멜로디가 중요하다고. 우린 정말 누가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놓기라도 한 듯이 그 취향마저 달랐다. 나는 가사가 좋았다. 언제부턴가. 처음 노래를 듣기 시작했을 때는 멜로디를 찾아 들었고, 다음 노래를 들을 때는 유행하는 노래들을 골라 들었고, 그 이후에는 누군가 좋다고 하는 노래를 괜히 한 번 들어보기도 했는데 노래를 듣다 보니 나는 아무래도 가사에 감동이 있는 노래가 좋았다. 어떤 종류의 감동이든. 시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가사들을 좋아했다. 멜로디가 귀에 붙지 않다가도, 한 줄 가사에 꽂히면 그 가사를 외울 때 까지 한 곡만 듣기도 했다. J는 이런 내 얘길 가만히 듣다가 본투비 글쟁이네. 하고 웃었다. 나는 그가 웃을 때면 J의 입가 주변을 본다. 이건 비밀스러운 고백과도 같은 말인데 그는 웃을 때 입꼬리가 예쁘다. 아마 몰랐겠지만.

천천히 이야기를 하다 술을 홀짝거리며 천천히 마셨는데 앞서 말했듯이 J는 술을 못하는 편이라 삼분의 일 정도를 마시고 훅 하고 취해버렸다. 그는 주사가 잠드는 거라서 조금 걱정했는데 졸리다고 눈을 몇 번 비비기는 했지만 그래도 멀쩡히 대답들은 했다. 불쑥 J는 귀가 먹먹하다고 했다. 물 속에 들어간 것 처럼? 응. 그리고 관자놀이 윗부분이 띵해. 그거 취한거야. 아냐, 음, 음, 취했나? 사실 살짝 알딸딸 해. 그의 허둥거리는 말에 응 너 그거 다 못 마실 것 같았어, 라고 이야기하자 갑자기 J는 이상한 객기를 부리며 다 마실 수 있다고 떵떵거렸다. 힘들면 남겨 내가 마실게. 됐어. 이거 내 꺼야.

J가 취했을 때를 기점으로 우리의 술 마시는 속도는 조금씩 차이가 벌려졌다. 그가 연거푸 물만 들이킬 때 나는 다음 술을 시켰다. 나도 살짝 띵 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러면 어떤가. 취하니까 좋은 게 술인데. 공부를 계속 하고 있을 때 교수님 중 한 분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취하지 않을 거라면 뭐하러 술을 마시니?



봄베이 하이볼 다음으로 내가 시킨 건 레몬 맥주였다. 언젠가 대학로에서 J와 연극을 보고 나서 맥주집에서 스위트 자몽 맥주를 먹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시럽을 섞어서 나왔던 거라, 이번에도 그렇게 나오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생맥주 위에 사분의 일 조각 쯤 되어보이는 레몬이 숭덩 잘려 올라가 있었다. 생각했던 것과 다른 비주얼에 J와 연거푸 신기하다고 하는 중에 사장님이 조심스럽게 다가오시더니 맥주 거품 좀 더 올려드릴게요. 하고 이야기하셨다. 괜찮다는 내 말에도 손님 기다리는 동안 거품이 많이 빠져서요-J와 나는 레몬맥주를 주문하고 화장실에 다녀왔기 때문에 빈 자리에 맥주잔이 놓여있었다.- 하시며 새로 거품을 따라주셨다. 사실 정말 상관 없었지만. 거품이 하얀 이불을 편 것 처럼 얇게 올라가 있었고, 이번에는 거품이 사라져버리기 전에 입을 대고 후룩 마셨다. 그전에 먹었던 과일 맥주들과는 달랐다. 일단 진짜 과일이 올라갔다는 점도 달랐고, 단 맛 없이 깔끔하게 레몬 향에 맥주 거품을 먹는다는 게 묘했다. 묘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취향이었는데, J는 한 입 먹고 괜찮지 않냐는 내 말에 에-하고 혀를 내둘렀다. J는 나와 그간 많은 맥주를 마셔 봤지만 개인적으로 맥주가 맛있는 지 모르겠다고. 다만 치킨이랑 같이 먹으면 고소하긴 하더라.

J와 뭘 먹게 될 때마다 나는 간단히 한 잔씩이라도 맥주를 시키곤 하는데 J는 무슨 심보인지 꼭 한 입씩 뺏어먹고는 맛 없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먹는건데 본인이 왜 괜한 심술인지 몰라. J와 음식점에서 메뉴를 주문하고 생맥주 한 잔만 주세요 하고 이야기하면 보통 술잔은 어디 놔드릴까요? 하는 질문을 받는데, 내 쪽으로 놔 달라고 할 때면 J의 괜한 시선이 느껴진다. 뭘 봐. 하고 짓궂게 이야기하면 J는 입이 비죽 나와서, 하여튼 술쟁이, 술쟁이. 하고 궁시렁댄다.



나는 레몬 맥주를 다 마시고도 성이 안 차서 '사와'라는 일본 술이 들어간 하이볼 느낌의 술을 주문했다. 그리고 감자칩도 하나. J는 갑자기 내 손목을 잡아채고는 나 음료수 마시고 싶어, 하고 이야기했다. J는 고집대로 자기 술을 다 마시고는 취기가 올랐던 게 가라앉고 있었던 참이니까. 그는 술이 확 올라오면 얼굴이 전체적으로 빨갛게 달아오르는데 다시 J를 찬찬히 보니 얼굴에 올라왔던 빨간 기운은 수그러든 참이었다. J의 음료수를 시키고 뒤를 돌아 술을 만드시는 걸 또 한 번 봤는데 사장님께서 술 좀 진하게 드릴까요? 라고 이야기하셨다. 나는 냉큼 좋다고 대답했고, 글라스에 반 정도 사와를 따른 후에 다른 것보다 많이 타 드렸어요. 하고 이야기하셨다. 그리고는 취하실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당차게 대답하고는 J와 눈을 마주치며 취하니까 얼마나 좋아요. 하고 키득거렸다.

차보다 술을 즐기는 건 취할 수 있으니까. 건강을 생각하면 차를 즐기는 편이 더 좋겠지만. 술을 마시고 나면 그간 미처 하지 못했던 말에 대해, 우리가 나눠왔던 끝없을 대화에 대해, 그리고 어쩌면 괜찮을 지 모르는 시덥잖은 이야기들에 대해 주절거릴 수 있으니까. 술잔을 기울이는 동안은. 술을 마시는 시간은 신데렐라의 호박마차 같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거나, 사라지거나. 사실은 허상같은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의 즐거움에 어쩔 수 없이 기분을 맡겨야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너를 더 많이 알기 위해서는.


J와는 새벽 세 시가 다 되어 헤어졌다. 술집의 마감 시간을 기어코 딱 맞춰서. J는 시간이 늦었다며 근처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고, 내가 억지를 부려 결국 우리 집 앞까지 배웅받았다. J가 술을 마시는 동안 이런 거에 맛들리면 안되는 데. 하고 이야기했던 게 생각났다. 하루 끝의 술자리. 그는 여태 술을 이렇게 자주 마시러 간 적은 없다고도 했다. 그럼 자주 마시러 다니면 되지. 이미 자주 마시고 있어. 한숨같은 대답. 그래도 비슷한 점이 생긴다는 건. 너무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조금은 비슷한 사람들이 되어갔던 밤. 새벽.


20190217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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