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와 트레이닝복, 슬리퍼

바(BAR)

by 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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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와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봤다. 함께 작업하는 극단에서 종종 보기는 하지만 최근 극단 내에서 딱히 이렇다 할 일이 없었기에 둘만의 술자리를 가진 것은 이번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K는 오랜만에 술 마시는데 전에 가고 싶어했던 새로 생긴 동네 바에 가자고 했다. 사실 나는 와인바를 제외하고는 제대로된 바에 가본 적이 없어 조금 긴장했다. 긴장한 것 치고는 우리 둘 다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이었기에(물론 슬리퍼는 나만 신은 상태였다.) 쭈뼛거리며 바에 들어갔다.


최근에 본 영화 중 <소공녀>라는 영화가 있는데 약간은 스포일러지만 영화에 나오는 '미소'라는 주인공은 하루 마무리에 꼭 위스키를 한 잔 마신다. 그 장면을 보고 나서부터 나는 양주에 대한 환상이 있었지만, 양주라는 건 이미지대로 보자면 그저 쎈 술에 불과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평소에 알콜 냄새가 코를 때리는 게 싫어 소주도 잘 안 마시는 사람인데. 술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지레 양주도 소주랑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작품 중 위스키를 마시는 미소의 표정이 항상 어딘가 씁쓸해서 더 그래보였던 건 아닐까.


술에는 정말 여러가지 종류가 있고, 취향이 있지만 가끔은 겁이 나도 시도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날처럼. K는 전에 진, 위스키같은 양주에 취미가 생기면서 남대문쪽 주류시장을 돌며 좋은 술을 구해 집에서 마시고는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나도 함께 마신 적이 있고. 다만 그 때는 달달한 음료들을 더해서 마셨으니 근본의 위스키나 보드카, 럼, 진 같은 양주의 향을 많이 느낄 수 없었을 뿐이고. 첫 바 도전과 동시에 첫 양주의 도전이라니. 그것도 샷으로! 샷으로 벌컥벌컥 양주를 훅 마셔버리는 사람들이 나오는 드라마만 보다가. 우리가 자리에 앉자 친절하게 코스터를 하나씩 깔아주시고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우리는 짧게 고맙습니다, 하곤 메뉴를 뒤적였다. 내가 한참 뒤적거리면서 보고 있자 K는 그렇게 고르다가는 백날 골라도 못 마신다고 메뉴판을 빼앗아갔다. 사실 봐도봐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에 괜히 생글거리며 사장님에게 양주가 처음이라 추천해주실 수 있냐고 물었고 사장님은 달달씁쓸한 초콜릿 맛이 나는 바닐라 향의 양주가 있다고 추천해주셨다. 사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양주를 처음 먹는 사람들도 부담스럽지 않게 마셔볼 수 있다고. 사장님의 친절한 추천에 그걸로 주세요, 라고 말하고 K와 나는 그간 둘이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나와 K는 주변에서도 많이들 닮았다고 이야기하는 편인데 서로 한참을 못 느끼고 부정하고 있다가 서로 인정하고 닮은 점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하기 시작했다. K는 함께 하고 있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고 나는 K의 의견에 대해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러다 결국 끝에 이어진 것은 K의 전 연애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K와 그의 여자친구가 이별한 후에 그의 여자친구와 한 번 사적으로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내가 K에게서 듣지 못했던 그들의 이별에 대해 자세하게 들었었는데, K에게 그 이야기를 전할까 말까 하다 툭 뱉듯이 그랬었다며? 한 이야기에, K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를 울게 만들 작정은 아니었는데. 기분이 오묘했다. 그를 비난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K는 숨을 두어 번 고르고는


난 아직도 그 이야기 하기가 힘들더라.


하고 이야기했다. 자기와 제일 친한 친구들에게마저 자세히 이야기하지 못한 부분이라며. 헤어지는 순간을 다시 상기하는 것 만큼 슬픈 일은 없을 텐데, 순간 배려 없이 던진 말이 무거운 책임으로 돌아온 거 같아 마음이 쓰렸다. 나는 슬리퍼를 괜히 툭툭 벗었다, 신었다 하며 나름대로 K의 눈치를 살폈다. 아마 내가 보다 자세히 물었거나, 이별의 순간에 대해 묘사했다면 그는 반드시 울음을 터뜨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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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와 나는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또 나누었다. 언젠가부터 서로의 이별은 각자의 술자리에서 뺄 래야 뺄 수가 없었다. 나는 오히려 이별 후에 한 이틀, 삼일 정도만 괴롭고 슬프다가 이후에 아무렇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냥 나는 후회 안 해. 그 사람이랑 헤어진 것도, 다시 안 만나기로 결정한 것도. 내가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나는 정말 노력했고, 그게 안 될 때 헤어진거니까. 그리고 나는 이제 눈물도 안 나. 아득한 옛날 일 같아.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닌데.. 이제는 먼 옛날 같아.


내 말이 끝나고 K는 웃으면서 맞아, 너는 그런 거 같더라. 하고 가볍게 맞장구쳤다. 그는 담담하게 호흡을 가다듬고는 이야기할려면 할 수는 있다면서 자신이 이별을 말한 날에 대해 이야기해줬다. 얼마나 한참을 울고, 한참을 고민했는지에 대해서.

K는 언제나 내게는 좋은 사람이었다. 다만 길어지는 연애의 호흡을 견딜 수 없을 때 이별을 결정했을 뿐이다. 내가 겪어온 이별은 대체로 한 쪽만 준비된 경우가 많았다. 사랑을 준비할 수 없듯이 이별도 같다. 출발선에서 같이 이렇게 하자, 결정하고 출발했대도. 같이 달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혼자 달려서 이미 마침표 가까이 갔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별은 그가 좋은 사람인 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두 번째 술로 칵테일을 시켰는데 K는 전에 먹었던 것 같은 풀잎 향이 진하게 나는 드럼통이라는 칵테일을 주문했고, 나는 사장님이 추천해주는 시그니처 칵테일을 마셨다. 한 모금씩 마셔봤을 때 K의 칵테일은 좀 더 술 향이 독하게 올라왔고 내가 시킨 칵테일은 부드러웠다.

양주는 신기했다. 이름을 따라가는 것 같은 맛이었다. 이름이 기억났다면 조금 더 자세히 서술했을 텐데(이런 순간에 나는 다음엔 제대로 적어놔야지 하는 후회를 조금 느낀다.). 양주는 혀에 닿기 전부터 향이 올라왔는데 향을 맡고, 혀에 적시고, 목으로 넘기면 시시각각 향이 변했다.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칵테일을 추천받을 때도 향이 많이 나는 걸 좋아한다고 이야기했다. 칵테일도 역시 좋았다. 이 날 마신 것은 전부. 좋았다.

제대로 양주를 마셔본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는데, 첫 번째 역시도 K와 마셨던 것이었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가끔 양주는 얼굴이 빨개지고, 소주는 발바닥이 빨개진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양주를 마셔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술이야 뭐든 마시면 얼굴은 좀 달아오르는 구나. 우리 각자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자 바에 있던 사장님이 조금씩 말을 걸어왔다. 바의 매력이란, 사장님과 그 주변 손님들과 두런두런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겠지. 우리는 둘이 와서 두어 시간을 조근조근 떠들어댄 탓에 손님들과 이야기할 기회는 놓치고 말았지만 사장님들과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여자 사장님 한 분, 남자 사장님 한 분. 두 분이 같이 바를 운영하신다고 했다. 두분은 부부나 연인은 아니고 그냥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이라 만나서 이야기하다 보니 같이 할까? 해서 하게 됐다고. 처음에 여 사장님은 우리보고 무슨 사이냐고, 애인이냐고 물어봤는데 우리는 서로 손사래치며 '아니에요!'하고 다급하게 대답했다. 사장님은 웃으시면서 아 그냥 친구구나. 그런 사이 좋죠. 술 한잔 같이 하는 친구. 근데 친구사이도 호감이 있어야 친구를 하는 거에요. 내가 그런 거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K가 저희 그렇게까지 친하진 않아요. 라고 선을 그어버렸다. 나는 술도 마셨겠다, 할 말도 다 했겠다 싶어서 너 그렇게 말할 때면 내가 얼마나 서운한 기분이 드는지 아냐고 물었다. K는 당황하며 자기가 말한 뜻은 그냥 매일매일 보고 하는 사이가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거라고 주절주절 변명했다. 반쯤은 장난이지만 자꾸 의도적으로 K가 선을 긋는 걸 보고 있자면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남녀사이에 영영 친구로만 남을 수 있는 사이는 희박하다고 믿는 두 명이 친구로 지내고 있으니 누군가 하나는 선을 그어 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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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 더, 한잔 더를 외치기에 나는 아직 양주를 잘 몰랐고 K는 배가 불러오는 듯 했다. 게다가 우리는 오랜만에 코인노래방을 들리기로 했기 때문에 어서 자리를 떠야 했다. 코인노래방으로 향하기 전에 각자 화장실을 들리려고 매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여자 사장님과 반대편 자리에 앉아있던 손님이 함께 나왔다. K가 화장실에 간 사이 술도 먹었겠다, 싶어 괜히 말을 붙였다. 여기 바 자주 오시나봐요 손님은? 그랬더니 손님은 얼굴을 붉히며 약간은 당황한 듯 아 네네, 자주 오지요. 사장님들이랑 친하니까. 하고 대답하셨다. 옆의 사장님은 그런 손님에게 오빠는 다른 손님들 앞에서는 꼭 착한 척 하면서 말하더라 하며 짓궂은 농담을 했다. 한 마디 더 하려는 중에 K가 화장실에서 나왔고, 나는 키를 받아들고 저 일단 화장실좀 다녀올게요, 하고 화장실로 갔다. 내가 잠깐 없는 동안 K와 사장님, 그리고 손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오니 화기애애하게 웃고 있었다. 수줍어하던 손님은 다음에는 꼭 술 한번 같이 마시면서 이야기하자고 했고 우리는 얼마든지 좋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코인노래방으로 가는 내내 동네에 아지트가 생겼다고 좋아했다. 우리는 종일 이야기해도 이상하게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미묘한 정적이 찾아오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는 정적이라는 단어와 크게 어울리는 사람들인 것 같지 않았다. 다음에 꼭 다시 오자는 이야기를 했다. 코인 노래방을 마치고 서로의 집 가운데 지점까지 걸어갔다. 우리는 집이 원체 가까워서 날이 새도록 서로 데려다줬다가, 다시 데려다주고, 다시 중간에서 헤어지기로 약속했다가 좀 더 갔다가 했던 전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출발하며 약속했다. 서로 데려다주지 않고 중간에서 헤어지기로.


K는 그날 나와 헤어지면서 너랑 술 먹으면서 너 안 취한거 이번에 처음 보는 것 같다, 고 이야기했다. 이상하게 괜찮았다. 밤 공기가 쌀쌀해서 더 그랬나. K는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상태였다. 그의 말에 나는 아 시간만 있었으면 더 마시는데. 원래 술은 취할려고 마시는 거잖아. 하니 K는 슬쩍 웃으면서 너 답네. 하고 대답했다. 봄 치고는 추운 밤이었다.


20190422

동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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