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하니까 얼마나 좋아요

맥주, 텐더 감자튀김

by 디디
KakaoTalk_20181226_201251027.jpg 생활맥주

S와 만났다. 오랜만에 우리 동네 근처에서. 항상 만나는 쪽도 우리 동네가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하게 가깝지만 또 그렇다고 걸어다닐 거리는 아닌 정도여서. 그건 S에게도 그랬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중간쯤인 그 곳에서 자주 만나곤 했는데, 사실 오늘은 내가 기분이 말이 아닌지라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고싶지 않아서 이쪽으로 오라고 S를 불렀다. S는 싫은내색 없이 그래 좋아, 대신 안내해줘야해 하고 이야기했다.

오늘은 사실 S를 만날 생각은 없었는데 내 우울하다는 사정을 듣고 나서는 어떤 말을 덧붙이는 것 대신에 오늘 볼까? 하고 이야기했다. 나는 아무 말없이 그렇게 덧붙여준 만나자는 말이 너무나 고마웠다. S앞에서 뭔가를 이야기할 때 나는 다른 이들 앞에서보다 솔직한 편이다. 그건 아마 S도 그럴 것이다. 내가 괜찮지 않다고 한 말에 바로 만나자고 이야기해 준 것 처럼. S는 일이 마치자마자 내가 있는 쪽으로 온다고 했다.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그 말이 고마웠다는 내 말에 S는 천연덕스럽게 야 그런 안 괜찮은 말들은 우리 만나서 얘기해야 해. 카톡으로 한다고 다 사라지는 기분이 아니야.


사실 안내해준다고 말은 했지만 나도 그쪽 지리는 잘 모르는 지라 S와 쭈뼛거리며 조금 두리번거리다가 새로 생긴 것 같은 생활맥주에 들어왔다. 대학로에서도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치킨이랑 맥주를 같이 파는 곳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을 가져다 주셨다. 생활맥주는 수제맥주를 같이 파는 곳이었는데, 수제맥주 초심자를 위한 가이드같은 것을 함께 주셔서 하나씩 골라보는 재미가 있었다. 나는 페일에일을 시켰고 S는 항상 그렇듯이 스타우트를 시켰다. 나도 흑맥주를 좋아하는 편이기는 한데 어제는 꼭 달달하면서 씁쓸한게 먹고 싶었거든. S와 맥주, 그리고 치킨텐더와 감자를 시켜놓고는 연거푸 한숨만 쉬었다. S는 일하는게 어렵지는 않지만 피곤하다고 했고 나는 농담조로 사는 게 피곤하지 하고 받아쳤다. 우리는 그렇게 뜬구름잡는 이야기만 허허실실 하다가 맥주를 먼저 주시기에 잔을 받아들고 다시 짠. 하고 맞부딪혔다. S는 여기도 맥주를 먼저 주시네 너무 좋다. 하고 이야기했다.

KakaoTalk_20181226_201145461.jpg 내가 시킨 페일에일과 S의 스타우트.

한 모금 홀짝 마시고 나서 우리는 본격적인 얘길 시작했다. 어제의 내 하루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그 모든 일을 겪고 나서 내가 어땠는지. 그리고 내가 얼마나 울고 나서야 후련해 졌는지. 나는 원래 이야기하기 전에 서론이 긴 편이라서. 한참을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했던 이야기를 하고 또 하고. 그래도 S는 재촉함 없이 끄덕임 몇 번. 짠 몇 번. 나는 답답한 사람이라 화를 잘 못 낸다는 내 말에 S는 답답한게 아니라 착한 거라고. 그리고 원래 솔직하게 말하는 것도 두려워 하는 사람인데 나는, 언니한테는 안 괜찮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어서 좋았다는 말에도 나아지고 있으니까 괜찮은 거지. 그리고 괜찮은 날만 있을 수는 없다는 뻔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쯤 시킨 치킨이 나왔다.

KakaoTalk_20181226_201133415.jpg 치킨텐더와 감자! 이만원도 안 되는 가격!

가성비 짱이라고 스티커가 붙어있기는 했지만, 가게에서 정한 가성비의 기준은 어딜 가도 이상했기에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시켰는데 꽤 많은 텐더에 많은 감자! 나는 사실 치킨보다는 감자튀김을 더 좋아한다. 포실포실하고 따듯한 감자.

치킨이 나오고 우리는 맥주를 반쯤 마신 상태였고 맥주 밑에 깔려있던 코스터를 보며 웃었다. 취하니까 얼마나 좋아요! 하는 글씨. 앞과 뒤가 뭉그러져서 써 있는 글씨를 보며 나는 언젠가 '광수생각'에서 읽었던 짧은 만화가 기억났다. 어떤 사람이 여느때와 다름없이 술을 홀짝 홀짝 마시다가 주머니에 쪽지가 넣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쪽지에 써 있는 글을 읽으려고 미간을 찌푸려가며 보았지만 글씨가 읽혀지지 않아서, 쪽지를 테이블에 올려 두고 연거푸 술을 들이킨다. 그 사람이 취해서 알딸딸해졌을 때 쯤 다시 쪽지를 보았을 때 '다시는 술 먹지 말자!' 라고 쪽지에 써 있었다는 그런 이야기.

S는 저 코스터를 보자마자, 그리고 자리에 앉고 저 문구를 보자마자 앞으로 우리의 모토야! 하고 이야기했다. S는 중간중간 그 문구를 읽으며 취하니까 얼마나 좋냐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S에게 오늘 아침 지인과 통화한 내용을 이야기했다. 나는 오늘따라 전화로 들볶는 사람들이 많아 괴로웠었는데 하필이면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게 괜히 슬펐다. 오늘 통화한 지인-편의상 A-은 몇번 술자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한 사이였다. 친구라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만큼은 친하지만 막상 얼만큼 친한데? 하면 대답할 수 없는 사이. 나는 원래 비는 시간에 연락을 하지 않던 친구들에게 전화하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A와의 전화도 그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내가 전화를 건 시간은 12시쯤이었고, 일어났냐는 내 말에 A는 어제 늦게 들어와서 좀 더 자야될 것 같다고 했다. 술을 마셨냐고 묻자 그렇다며 나이를 먹으면 몸이 예전같지 않다, 고 했다. 그 말에 나는 장난으로 그게 꼭 나이 탓이겠어? 라고 말했는데 A는 약간 발끈하며 너도 나이 먹으면 다 이렇게 된다네 앞길 생각해서 잘 가리라고 했다. 다 자기가 생각해보고 얘기해주는 거라고. 그래서 나도 그냥 틱, 내가 앞으로 뭐가 될지도 모르는데 왜 지금부터 조심해야 해? 하고 이야기했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들은 S는, 뭐야 복학생 꼰대같아 몇 살인데? 나는 깔깔 웃다가 뚝 멈추고, 걔.. 스물 여섯밖에 안 됐어. 하고 대답했다. 아직까지도 있다, 전형적인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말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매일 결심했다가 다시 발끈한다. 이 발끈함은 '감히 날 건들여?' 보다는, '이새끼가?'에 가까운 발끈함이다.


S와 첫 잔을 다 비우고 500짜리 한 잔씩을 더 시켰다. 우리의 예상이랑은 다르게 엄청나게 귀여운 잔이 나왔다.

KakaoTalk_20181226_201129771.jpg 귀여운 맥주

S는 조금 더 큰 잔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저번에 우리가 뉴욕야시장에서 먹었던 1000짜리 맥주 이야기를 했다. S는 그건 다 마시고 진짜 배불렀잖아. 하며 배를 통통 치는 S에게 나는 취하지는 않았고? 하고 물었고 S는 취하지, 근데 인생은 다 그런 거야. 깰 때쯤 취하고 취할 때쯤 깨고.

두 잔째의 맥주를 홀짝이며 서로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했다. 말하자면 사실은 내 동생에 대한 이야기와 S의 동생에 대한 이야기. 우리는 나이가 똑같은 동생을 한 명씩 데리고 사는 중인데 내 동생은 심각한 말썽꾸러기에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는 여동생이고 S의 동생은 체대 입시를 목표로 준비했던 사고뭉치다. 우리는 가끔 동생들에 대해 애정이 없는 것 처럼 말하고는 하지만 가족으로서의 의무나 사랑은 다 하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최근 동생이 집에 잘 들어오지 않으려고 한다는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심지어 어제는 동생이랑 이야기좀 해보라는 엄마의 말에 내가 성질을 부렸다는 이야기를 하자, S는 그 기분 뭔지 알 것 같다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뭔가 문제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단지 가족이고, 언니고 누나라는 이유로 꼭 책임져야 하는 일이라는 거. 우리 엄마도 항상 얘기해. 엄마 죽고나면 너네 둘 밖에 안 남으니까 사이좋게 지내라고. 근데 난 글쎄...


S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그렇다고 했다. 나는 걔가 아니니까, 나도 모르는데. 내가 이야기해본다고 뭐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대화는 둘이 하는 건데 동생은 대답을 잘 안 해주니까. 나도 아직 그렇게 누군가를 책임지고 책임져야만 하는 나이가 아닌데도.

우리는 말을 마치고 잔을 부딪히고 짠, 하고 나서 한 모금을 크게 마셨다. 꿀꺽, 하고 목 넘기는 그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귀가 멍멍해질 정도로. 그렇게 쭉 마셔야 목끝에 걸려있던 울음이 쏙 들어갈테니까. S는 잔을 내려놓고


씁쓸하네.


하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씁쓸한 여러 잔을 뒤로 하고, 집에 일찍 가봐야 하는 나 때문에 헤어졌다. S는 건물을 나와서도 자기가 2차를 사겠다고 하면 갈 거냐고 묻고,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지만 어제는 배가 너무 불렀기에-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너무 추웠다.- 그 자리에서 깔끔히 헤어졌다. 둘 다 적당히 기분 좋아질 정도로만 마신 하루. 가끔 안 괜찮은 날이 있는 것 처럼 가끔은 이렇게 적당히 취하는 것도 좋은 거지.



20181227

너무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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