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적당한 거리

S와 아이스크림 맥주

by 디디

요즘 나는 뜬금없이 우울하다. 아무리 기분전환을 하고 환기를 해 보아도 마찬가지인 것은 마찬가지인 것이다. 무얼 하고 싶은 지도 잘 모르겠다는 마음이 불쑥 먼저 들고 나면 하고 있던 것도 조용히 내려놓는다. 그러면 나는 마치 아무렇게나 던져진 짝 안 맞는 양말처럼 웅크린다. 그렇게 앉아있다 보면 세상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나는 집안 거실 한 가운데 온전히 혼자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렇게 웅크리고 있다 보면 밤이라는건 길고 깊어서. 그리고 조용해서. 내가 말하지 않은 것들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 괜히 한참을 그렇게 있는다. 웅크린 채인 나도 밤의 파도에 휩쓸리게. 그래서 그 조용하지만 소란스러운 밤에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되었으면 좋겠어.


밤마다 우울하게 보내는 시간이 늘면 늘수록 아침 시간에 괜히 웃어대고, 떠들어대곤 했다. 사람들이 없는 뒤에서는 한숨을 쉬다가도, 누군가 오면 바로 장난스러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해야 죽을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들지 않아서. 아침에 이래저래 에너지를 소진하고 나면 또 밤이 왔다. 반나절 내내 밖에서 쓰고 온 에너지의 피로가 발끝부터 손끝까지 저릿하게 몰리면 나는 또 우울함을 안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정말, 정말 참을 수 없어졌을 때 S에게 연락을 했다. 평소와 다르게 뭐하냐는 안부인사도 없이. S와 B가 같이 있는 그룹채팅방에. 너무 힘들고 우울하다고. 이유없이 얘기했을 때 S와 B는 자세한 이유를 말하기도 전에 위로해주었다. 힘들어하지 말라며, 힘들면 같이 있어주겠다고.




그 위로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S가 공부하는 독서실로 찾아왔다. 한참 S와 독서실 앞에서 대화를 하다가, 맥주 한 잔만 하자는 S의 말에 안된다고 완강히 거부하면서도 한참을 떠들었다. 그렇게 떠들고 떠들다 보니 거의 삼십분을 넘겨가고 있었고 그제야 나는 이럴거면 마시러 가자고 이야기했다. S는 입으로는 그럼 진작 먹으러 가지 그랬냐고 투덜거렸지만 짐을 챙기는 손은 신나보였다.


정말 간단하게 한 잔만 하자는 기분에-또 S가 자신이 술을 사겠다며 떵떵댔었다.- 짐은 그대로 다 두고 손만 덜렁 나왔다. 독서실 뒤편의 작은 맥주집을 가려다가 금요일 밤이니만큼 꽉꽉 들어찬 자리 때문에 그대로 튕겨져나왔다. 어딜 갈까 두리번대다가 평소에 '숲'에 갔다가 나오면 정면에 보이는 아이스크림 맥주를 판다는 호프집에 눈길이 확 쏠렸다. 언젠가 한번은 가보자고 한참 이야기했던 곳인데, S는 흔쾌히 동의했다. 왜냐면 우리가 함께 시도했던 술집은 단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어서.

2000비어 첫 입성


S와 들어가자마자 생각보다 와글와글한 호프집 분위기에 놀랐지만, 우리는 막상 나가봐야 그 근방에 갈 데가 없었기에 구석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구석쪽에 가니 꽤 아늑했기에 아무 말 없이 같이 먹을 안주를 하나 골랐다. 평소에는 내가 콘치즈나 골뱅이를 먹자고 하면 득달같이 싫다고 하는 S가 오늘은 왠일인지 콘치즈를 시키자고 먼저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아직 시작도하지 않은 우울한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 같아서. 괜히 코가 찡했다.


아이스크림 비어

시킨 콘치즈가 나오기 전에 맥주가 먼저 나왔다. 요새는 종종 맥주가 안주와 같이 나오는 술집이 꽤 많은데 나와 S는 보통 술이 먼저 나오는 걸 당연히 좋아한다. 그래야 잔을 더 부딪힐 명분이 생기니까. 안주가 나오기 전에 갈증나니까 한 잔. 그리고 안주 먹으면서 한 잔, 두 잔씩 더. 아이스크림 맥주는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고 사장님이 쩔쩔매며 이야기해주셔서 혹시나 싶었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꼭 먹어보고 싶었으니까. 생맥주 위에 생맥주를 얼려서 슬러시처럼 만든 아이스크림이 올라간다고 했다. 맥주 위에 어떤 아이스크림이 올라가야 어울릴까를 조금 고민하고 있었는데, 설명을 들으니 고민할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서 단번에 결정했다. 술 위에 술. 아마 술에 뭐가 들어가고 올라가도 이보다 좋은 조합은 없을 테니까. S는 내가 아이스크림 맥주를 시켰기 때문에 그냥 생맥주를 하나 시켰다. 첫 잔이 나오고 우리는 습관처럼 잔을 부딪혔다. S는 그래서 무슨 얘기가 길게 하고 싶냐고 대충 물었고 나는 봇물 터지듯이 그간의 우울했던 일을 쏟아냈다.


그냥 더 이상 공부하는 건 힘들지 않은데, 하고싶은 걸 못하니까 마음이 힘들어. 공부하면서 사치라는 걸 아는데도. 하고싶은 걸 하기 위해서 하기싫은걸 해야하니까.


S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이야기했다.


네가 해야하는 걸 한다고 하고싶은 걸 포기하지는 마. 다른 사람들이랑 비교해서 너를 거기 맞추지 마.


나는 원래 남들의 잔소리를 잘 안 듣는 편인데, 그건 그 이야기가 맞는 말이라는 건 나도 알지만 나한테 적용시키기에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서 와닿지 않기 때문인데도 S의 말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다른 이들의 말이 귀찮다는 건 아니지만. S는 어떨 때는 가깝다가도 가까이 가보면 적당히 거리를 지키고 있다.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어.


S는 후에도 내 주저리에 대충 장단을 맞춰주며 잔을 부딪혔다. 그리고 시킨 맥주가 2잔을 넘어갈 때 즈음 S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씩 늘어놓았다. 나는 굳이 꼽으라면 들어주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 S의 이야기를 조금 취기가 올라 올 것 같은 상황에서 조용히 들었다. S는 자신의 아주 사적이고 조심스러운 부분까지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내내 S는 이런 얘기를 하게 될 사람이 생길 지는 몰랐다고, 그리고 그게 만난 지 얼마 안된 나일 거라고 생각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그 다른 이야기들로 우리는 서로 공감하곤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S와 이렇게 전혀 상관없는 일들로 이야기하며 술자리를 보내는 것이 너무도 유의미하다고 느낀다. 평생을 다르게 살아온 이들이 한 자리에서 서로의 슬픔을 이야기한다는 것. 그리고 술 한잔과 끄덕임 몇 번으로 이어지는 유대감. 가벼운 듯 하지만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적당한 거리.


S와 약간 취한 상태로 술집을 나오면서 다음에는 어딜 가자, 여긴 어떻고 저긴 어떠하니까. 하는 말을 주절거렸다. 그러다 헤어질 지점에서 우리는 또 뒤도 안 돌아보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우리의 좋은 습관 중 하나였다.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씁쓸한 미소를 띄우고 천천히 멀어져 가는 게 아니라 '안녕 잘 가!' 하고 인사 후에는 홱 돌아서 집에 가 버리는 것. 나는 뒤를 잘 돌아보지 않는다. S 또한 그렇고.

아마 S와 내가 조금만 더 가까이 살았더라면 일주일중에 7일은 취해서 살지 않았을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것도 그것대로 좋은 관계였겠지. 지금처럼.



20181215

어쩌면 적당한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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