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카와 오렌지주스
K는 언제나 뜬금없이 연락이 온다. 어디야? 하는 카톡 몇 개로. 그리고는 성격은 급해서 내가 연락을 읽지 않으면 곧바로 전화가 온다. 내가 전화도 받지 않으면 카톡을 몇 개 더 남기고, 다시 전화를 한다. K는 생각보다 기분파다.
K는 배우 지망생이다. 원래는 어떻게 한다리 건너 아는 사이였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꽤 같이 지내오다 보니 친해져있었다. 여태 만난 인간 중에 제일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서는 나와 K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꽤 많이 한다. 생각하는 부분이 똑같다고. 예를 들어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고 나면 어떤 포인트에서 같은 감동을 느꼈다. 라라랜드의 결말 부분을 가장 좋아하는 것 처럼. 더 많은 예를 들고 싶은데 막상 나열해보니 나와 K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의 일들이라 주절주절 늘어놓기가 괜히 민망하다.
K와는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자주 보질 못 해서, 우리는 만나면 습관처럼 서로의 안부부터 묻고는 한다. 잘 지내? 하고. 솔직히 요즘 같은 시대에 그쯤 카톡 메세지 하나로 남기면 어떤가 싶지만 그래도 메세지가 필요할 때 보다는 사람과의 긴 대화가 필요할 때가 훨씬 많으니까.
오랜만에 K와 동네에서 만났다. K는 전보다 피곤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간단한 근황과 농담을 나누다가 K가 자기가 좋아하는 동네 술집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우리 동네 골목골목에는 좁고 작지만 괜찮은 술집들이 몇 개씩 있는데 이번 이자카야도 K가 찾아낸 곳이었다. 원래는 혼자 술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내 생각이 나서 전화해봤다고. K는 너 안와도 나 혼자 먹으려고 했어. 하고 이야기했다. 그래 알겠어. 짧게 농담같은 대답을 단지고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K는 잔을 하나 더 달라고 하더니 술부터 따랐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그냥 소주는 안 먹는다고 했더니 왜? 하고 되묻는가 싶다가, 그냥 너도 이유가 있겠지. 하고 먹고싶은 걸 시키라고 메뉴판을 건넸다. 자기가 사겠다며.
이자카야에 왔으니 저번에 먹어보고 꽤 괜찮았던 하이볼을 한 잔 시켰다.
하이볼 한 잔이요.
K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잘 지내냐고 물었다. 나는 잘 지내지 못해서 아니라고 대답했고, 그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한동안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삶이라고 하니 괜히 거창하지만 별 거 아닌 하루하루. K와 나는 각자 사귀던 사람들과 이별한 지 얼마 안된 상태였어서, 그런 저런이야기를 했다.
언제 진짜 끝이라고 생각했어?
나는 그 때. 그냥 돌이킬 수 없겠구나, 싶었을 때. 너무 추상적인가? 그래도 있잖아. 무슨 말을 해도.
누군가는 인정하거나 동의할 수 없겠지만 K와 나는 서로 공감했다. 이별을 고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 대해. 그리고 아무리 이별해봐도 좋은 이별이 어디에 있겠냐며. 말이 좋은 이별이지. 사실은.
서로의 이별에 관한 이야기가 끝날 때 쯤 술잔을 비웠다. 언제나 한 잔만으로 시작하는 술자리가 길어지는 이유는 한 잔 이후의 대화가 점점 더 길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결국 생맥주를 한 잔 더 주문하고 얼마 남지 않은 제육볶음을 뒤적거려가며 이야기했다. K의 가장 최근에 했던 '적의 화장법'이라는 연극에 대해서도.
나는 이 연극을 너무 인상깊게 봐서 원작인 아멜리노통브의 책을 사서 읽을 정도였다. 연극을 본 후에 책을 사서 읽었기에 읽는 내내 머릿속에 K가 했던 역인 제롬과, K의 상대 역할인 텍셀을 맡은 배우의 얼굴이 겹쳐 지나갔다. 나는 가끔이지만 K의 연기를 보고 나면 K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결국 우리는 날씨도 선선하니 집 근처에서 술을 한 잔 더 마시기로 했다. K는 애인과 헤어지고나서 좋은 술을 사서 모으는 취미가 생겼다고 하며 저번에 산 보드카를 가져오겠다고 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자몽탄산음료, 사이다와 각종 안줏거릴 샀다. 그리고는 보드카와 오렌지주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게 그렇게 맛있다더라, 이 보드카는 어디에서 샀는데 거기 술을 진짜 싸게 팔더라. 하는 이야기들.
K와 집 근처 강가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해댔다. 나는 K와 새벽 네시쯤이 되어야 헤어졌다. 웃긴 건, 서로 집까지 바래다 준다고 왔다갔다를 두어 번 정도 하고 나서야 그 시간에 들어갔다는 것.
K와는 다음에 언제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하고 헤어지지 않는다. 언젠가 또 보자. 그래 조심히 가. 재촉하지만 채근하지 않는 사이. 언젠가 또.
K와 강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