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와 S, 그 가을 밤 '숲'에서

막걸리와 김치전, 떡볶이

by 디디

가끔 S와 나는 서로에게 주변의 친구들을 자연스럽게 소개시켜주곤 한다. 당연히 술자리를 내리 함께하다 보니 나는 어딜 가든 S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하나쯤은 한다. S가 이런 얘기를 했었는데, 하는 이야기. 별 것 아니지만 서로를 나타내는 이야기들. S는 자신의 대학 동기들에게 나를 꽤 많이 소개했는데 그 중에 몇 명은 나와 만나고 싶다고 했었다고. 그러다 어영부영 B를 알게 됐다.


처음 만나기로 한 날도 B와 약속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 끝나고 맥주나 '간단히' 한 잔 하자는 내 말에, S는 자신의 친구도 와도 되냐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좋은 사람의 친구는 나쁜 사람일 리 없고, S가 술자리에 부를 정도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첫 날 일하는 곳 바로 앞의 이자카야로 갔다. 앉아있는 내내 사장님이 서비스를 하나 둘씩 주셨다. 고로케와 사케.

S에게 미리 B에 대해 들었을 때, 그는 상당히 낯을 가린다고 이야기해서 걱정스러웠다. 나도 금방 친해지는 거 같으면서도 꽤 오래 낯을 가리기에. -그냥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크기 때문에.-서먹하기만 할 까봐 조금은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걱정은 B와 두 세 마디 나눈 후 부터 걱정이 쑥 내려갔다. B가 한참 있다가 꺼낸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아직도 그 이야기가 가끔 생각난다.


나는 사람들끼리 나이로 오빠, 언니 하는 거 싫어. 그냥 B야, 이렇게 이름으로 불러주라.


그러고 B와는 연신 '반갑습니다'를 외치며 잔을 맞부딪혔다. B는 나와 놀라우리만치 맞는 부분이 많았다. 좋아하는 소설, 장르, 노래 그리고 샹송. 사실 샹송을 아주 즐겨듣는 편은 아니지만 B가 샹송을 컬러링으로 해놨다는 말을 듣고 나는 박장대소했었다. 처음 만난 날도 우리는 세 시가 넘어 집에 들어갔다.


B는 당시에는 군인이라 휴가가 끝나고는 자주 보지 못했다. 일단 내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와서여도 있었지만 셋이 같이 모이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B는 매번 만나자고 했지만, 다같이 시간을 맞추기가 코끼리에 냉장고를 집어넣는 일 보다 어려운 일이었기에. 그렇게 결국 미루고 미루다가 B가 제대한 다음 날 일요일 저녁에 모이기로 했다. 오랜만에 보는 자리라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오랫동안 친했던 사람들도 갑자기 보면 서먹하기 마련인데. 혹시나. 하는 생각.

다행히도 그런 일은 전혀 조금도 없었다. 만나자마자 어제 이야기했던 사람들처럼 즐겁게 조잘댔다. 최근에 B에게 내가 제일 인상적으로 읽었던 책에 대해 이야기했었는데 B는 마지막으로 휴가를 나왔을 때 그 책을 사서 들어갔었다고 했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후에 그는 감탄스럽다는 듯이 나와 꼭 책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추천해준 책은 전에 K가 했던 연극인 '적의 화장법' 이었다. B는 텍셀이란 인물, 그리고 제롬이라는 인물에 대해 엄청난 감상을 늘어놓았다. 그가 느낀 것 중에 내가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우리 둘이 이 이야기를 할 때 S는 가만히 앞에서 이야기를 들어 주다가 무언가를 묻기도 했다. 그럼 나는 전체적인 줄거리를 조금씩 더듬어 가며 설명해주었다. S는 B와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잠자코 듣다가 책의 내용에 대해 묻는다. 나는 항상 그런 S의 태도가 고마울 따름이다. 솔직히 누구라도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를 셋이 모인 자리에서 둘만 한다는 게 좋지만은 않을 터인데 S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이럴 때면 우리 셋은 적당한 거리에서 가깝게 살아가고 있기에 가능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조금 든다.


그 날의 모임은 S와 내가 최근에 발견한 안주가 너무 맛있는 술집이었다. 가게 이름은 '숲'인데 외관이 예뻐 지나칠 때마다 눈여겨보던 술집이었다. 저 안엔 얼마나 동화같은 풍경이 있을까. 하는 궁금함. 사실은 외관이 예쁘기도 하고, 매번 가던 술집이 질려서 다른 곳으로 가보자 싶어 원정 겸 떠났던 곳이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괜찮은 술집이라 S와 다시한번 더 오자고 다짐했던 곳이었다. S와 함께 새로 도전한 술집은 실패한 적이 없다. 누구와 마시는가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마시는가 하는 것이니까.

셋이 숲에 간 날은 비가 추적추적 오다가, 그치다가 하는 날이어서 간 김에 김치전을 시켰다. 사실 안주를 엄청 많이 먹는 편은 아니라서 안주를 뭘 시킬까 고민했는데 일단 비가 오니 전을 먹고, 밥을 먹지 않았다는 B의 말에 떡볶이를 하나 시켰다. 나와 S는 평소에도 많이 먹는 편은 아니어서 혹시 음식이 남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B가 한 입 떡볶이를 먹더니 너무 맛있다며 다 먹어치웠다. 그렇게 다 먹어치우고는 S가 볶음밥을 해야 한다며 원래 떡볶이에는 잘 안 해드린다는 사장님의 말에도, 볶음밥을 시켰다.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 억지스러웠던 것 같아 죄송스럽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볶음밥을 먹는 동안 S는 최근에 B가 자신을 바보 취급했다며 장난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머리 자르러 간다고 했는데, B가 갑자기 기요틴 알아? 하면서 얘길 꺼내는거야. 그래서 내가 잘 모른다고 했더니 글쎄 찾아보래. 진짜 유명하다고 하면서 요새 다들 머리 거기서 잘라~ 이러더라? 근데 그냥 귀찮아서 찾아보지도 않았는데 한참 있다가 기요틴을 검색해서 보내주는 거야.


나 역시도 기요틴이 뭔지 잘 몰라서 듣는 내내 어리둥절 한 표정을 지었었는데 알고보니 기요틴은 프랑스혁명 때 발명된 단두대의 이름이었다. S는 억울하다는 듯이 이야기했고, B는 옆에서 깔깔거리며 왜~ 거기서 다들 머리 많이 잘랐어. 원래 엘리자베스도 거기서 머리 자르려고 하다가 못 잘랐잖아. 하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B는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있어서는 열정적인 사람이라 어디 한 분야에서는 모르는 것이 없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때가 있다. 그가 전문적인 단어를 툭 던질 때면 내 머릿속에서 부유물처럼 떠다니던 의미없는 단어의 군락이 의미를 달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모르는 것을 들을 때면 불쾌하거나 거북스럽지가 않다.


우리 셋은 어딘가 닿아있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정육면체처럼. 어떤 모서리는 다른 모서리와 붙어있지만 그 반대편의 면은 어떻게 맞춰 보아도 영원히 만날 수 없다. 우리들은 닿아있는 면의 화제거리를 이야기할 때면 처음에는 비어있던 한 면을 꽉꽉 채우고 넘길 만큼 많은 이야기를 한다.

우리의 대화를 다 모아 적고 나면 사실 영영 닿을 수 없는 면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숲에서 시킨 막걸리가 세 병을 넘어갈 때 즈음 B는 당일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온 미술관에 대해 설명했다. 현대미술작품들을 주로 전시하는 갤러리라고 했다. 나는 사실 현대미술을 크게 좋아하지 않아서 사실대로 먼저 이야기했다. 굳이 따져 묻자면 나는 고전적인 게 좋다고. B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자신은 원래 현대 미술의 어떤 점을 좋아하고 하는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B는 나를 설득하려기 보다는 설명하려 했고 나는 그래서 B와 어떤 대화를 해도 불편하지 않다. 너무 타인을 완벽히 자신의 바운더리로 들이려고 하지 않는 적당함.

우리는 쉴 새 없이 잔을 부딪히다가 서로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늘 똑같지만 요새는 더 공부하기 싫다고 투정을 부렸고 B는 진지하게 내 투정같은 고민을 한참 듣더니


근데 넌 잘하는 게 너무 많잖아. 그니까 지금 당장 그걸 포기하고 다른 걸 시작해도 괜찮을거라고 생각해.


S도 조용히 듣고 있다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너는 못하는 게 없으니까. 노래도 그림도 글도. 넌 진짜 재능이 많단 말야. 그리고..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다른 것들을 완벽히 포기하고 있는 건 아니잖아. 나는 나중에 네가 뭐가 되어도 되었을 것 같아. 너는 왠지 정말로 성공할 것 같아. 그리고 그냥 지금 공부하고 있는 건 과정인거잖아. 만약 네가 공부를 했음에도 시험에 떨어지고 그래서 낙담한대도 이 기간이 어떤 중요한 과정이 될 거라고 생각해.


말을 마치고 우리는 잔을 부딪혔다. 식탁 위의 막걸리가 여섯 병을 넘길 때 쯤 우리는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왠지 말은 통하는 기분이었다. 취했었으니까. 우리는 가끔 오지 않을 미래를 셋이서 이야기한다. 아직은 없는 것들을. 가장 가까운 미래의 무언가를 약속한 건 B가 카메라를 사면 같이 사진을 찍기로 했던 것. B도 S도 다 떠나버리기 전에 다시 한 번.




가을 밤 숲에서

B와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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