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와 막걸리, 그리고 사과 소주
S와 만나게 된 건 일하던 카페에서였다. 내가 그만두면서 바로 내 다음 타자로 들어오게 된 S는, 그냥 보아도 조그마해서 처음에는 나보다 나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S는 갑자기 주방으로 쳐들어온 나를 보더니 눈만 꿈뻑거리다 내가 소개를 하자 그제야 고개를 까딱였다. 처음에는 웅크린 고슴도치 같다고 생각했다. 은근히 까칠해 말을 걸어도 툭툭 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한 두어 시간을 주방에 떠들다 보니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잔뜩 하고 있었다. S는 생각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었고, 나보다는 두 살이 많은 언니였다. S는 조금 친해진 후에야 내가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다며 깔깔댔다. 솔직히 말해서 귀찮은데 자꾸 말을 걸기에 대답해줬을 뿐인데 이렇게 친해질 줄은 몰랐다고.
S는 몇 년을 알아온 친구들보다 훨씬 금방 친해졌고 훨씬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는 일 주일 내내 쉬지 않고 술을 마셔댔으니까.
나는 원래 술을 가리지 않고 마시는 편인데, 물론 제일 좋아하는 건 막걸리다. 막걸리는 어떤 막걸리라도 맛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 뽀얗고 진하게 보들보들한 가루를 좋아한다. 먹고 나면 입이 쌉쌀하면서 달달한게 맛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음료니까.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 그냥 소주. 술도 맛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소주를 입에 대보고 퉤 뱉었다. 그 이후로 내가 술을 마시다 뱉은 적은 없다.
S도 술을 가리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 처음 술을 마시기로 한 날은 둘 다 진탕 취해서 새벽 3시에 집에 들어갔었던 것 같다. 첫 일 주일은 여기저기 누구 끼고, 저기 끼고 해서 마시느라 S와 단 둘이 무언가 이야기할 시간은 충분히 많지 않았었는데, 한창 그런 시기를 지나고 나니 둘만의 술자리를 종종 가졌다. 우리는 밥을 먹으러 만나서도 간단하게 한 잔 정도 하기로 하곤 했다. 물론 간단히 한 잔만으로 끝났던 적은 없지만서도.
보통 만나는 시간이 늦으니 차가 끊기기 전에 헤어지려고 노력은 하지만 막상 만나고 나면 너무 재밌어서 차가 끊기든 말든 한참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각자 나의 어떤 점에 대해, 너의 어떤 일상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하고 나면 괜히 마음이 울컥한다. 같은 걸 좋아하며 만나서 적당히 서로를 위해줄 수 있다는 것이 굉장한 위로가 되어서. S는 생각보다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본인은 누구한테 마음을 열기까지가 오래 걸린다고 이야기했었다. 어느정도 쌓인 상처는 금방 아물지 않으니까. 관계는 클 수록 결국에는 상처로 다가오게 되니까.
S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했다. 누군가를 만나고, 이야기하면서도 내 이야기를 많이 들려 줄 수록 적금처럼 쌓여서 어느새 돌아보면 커다란 덩어리로 남아 있으니.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도 있듯이-물론 이런 상황에 쓰는 말은 아니지만서도-. S와 이야기하는 내내 든 생각은 우리는 어떤 부분이 굉장히 닮았다는 것. 어디라고 콕 집어 이야기하기 뭐하지만. 좋아하는 술도 비슷하고, 공감하는 부분도 비슷하고. 그리고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어딘가 같은 사람인 것.
우리는 둘이 술을 마시며 서로 강요하지 않는다. 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S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서 S는 소설을 좋아하지 않고, 주로 인문학 쪽을 읽는다. 나는 인문학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누가 무엇을 읽든 자신이 읽은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작가는 어떤 부분이 좋고, 이런 문장이 매력적이고. S는 좋아하지 않지만 꾸준히 이야기를 들어 준다. 그래서 S와의 시간은 항상 즐겁고 새롭다.
매번 즐거운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 늘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S는 주로 힘든 일을 내색하지 않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을 신경쓰지 않는 편이지만 나는 굳이 스트레스를 파내어 맞부딪히고는 힘들어한다. S는 이해할 수 없어 하면서도 심심하게 위로해준다. 내가 무거운 이야기를 곧잘 털어내면 S는 어제 먹은 저녁 반찬 이야기 같은 것을 해준다. 어제는 콩자반을 먹었는데, 나는 젓가락질을 잘 못해. 쌀국수 먹어봤어? 이런 심심한 위로.
한 번은 S와 저녁 시간에 만났다. 역시 시작은 '간단하게' 한 잔 하고 가자. 였다. 우리는 답지 않게 술을 천천히 마셨다. 매번 만나서 이야기하는데도 우리는 이야깃거리가 넘친다. 아마 우리는 각자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면 서로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러나 각자 살아 온 세월이 2n년이 넘어가는 지금,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쉽게 끊일 리가 없다. 여하튼 그 날은 천천히 진지하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우린 만나는 날마다 주제가 조금씩 다른데 그 날은 과거의 연애와 트라우마에 대해 가감없이 이야기했었다. S는 과거 남자친구 이야기를 했다.
내가 만났던 사람이 있는데, 나는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간절히 좋아했었는 지 잘 모르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여가며 S의 이야기를 듣는다. 쓸데없는 대답은 하지 않고 최대한 말을 아껴가면서. 내 의견을 더해서 적는 것은 글로 족하기 때문에. 내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나면 S는 다시 말을 이어간다.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이미 조금 취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S와 술을 자주 먹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주량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방금 전 보다는 천천히.
나는 누굴 만나도 그냥 응, 좋아해. 이 정도가 끝인 거 같아. 사랑한다는 건 그냥 빛 좋은 개살구야. 겉 보기에만 그럴싸하고 속은 아무것도 없어. 그냥 맞장구치는 말일 뿐인 거야.
S의 말이 끝난 거 같으면 나는 들고있던 술잔을 내려놓고 대답한다. 그런 관계도 겪어 봐야 아는 거지. 경험해야만 아는 게 있다잖아. 하고. S는 조용히 수긍하고 나는 다시 이야기한다.
그런데, 굳이 겪을 필요가 있을까?
S와 결국 그 날도 저녁 6시쯤 만나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헤어졌다. 서로를 위해 헛된 약속은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느꼈다. 술을 그만 마시겠다거나, 오늘은 조금만 마시겠다거나 하는 약속. 점점 거짓말쟁이가 되는 건 싫잖아, 하고 우스갯소리를 했더니 S는 진지한 표정으로 가방에서 내가 아침에 사다준 마카롱을 꺼냈다-아마 이 시점에서 S는 아주 취해있었던 것 같은데, 눈치채지 못한 내 실수다.- 그리고는 배불러서 먹기 싫다는 내 입에 억지로 우겨넣었다. 후에 S는 그런 일은 정말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사실 모든게 뚜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집에 갔을 때 너무 배가 불러서 '이렇게 숨을 조금만 더 쉬면 방금 먹은 마카롱을 뱉을 수도 있겠는걸?' 하고 생각하며 잠에 들었던 것은 기억났다.
우리는 종종 정말로 취하면 했던 일을 잊어버리고는 하는데, 그렇게 잊어버리고 나면 다시 이야기하면 된다. 술때문에 잊어버린 얘기들은 바다속, 바다 위의 유실물처럼 떠다니거나 한 구석에 가라앉아 있으니까. 조금만 다시 이야기를 해주면 새록새록 다시 떠오르고는 하니까. S와 술을 마시며 했던 얘기 중에, 언젠가 여행을 함께 가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동유럽 쪽으로. 나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여행이라면 어디든 좋으니 알겠다고 이야기했고 S는 당장 내일이라도 떠날 것 처럼 잔뜩 신이 나서 여행 계획을 세웠다.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함께 고민하며 리스트에까지 적었다.
나는 항상 S의 이야기를 적을 때면 벌써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았다. 그렇지만 아직 내게 남은 밤들은 길 테니까 또 같은 이야기를 하거나 일어나지 않을 일을 또 기대하며 떠들게 되었으면. 조금은 상기되어 함께 떠드는 밤이 지나온 날들보다 훨씬 많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밤은 길고 술은 차니까.
201810
여름의 끝 긴 밤들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