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솦 솦 Aug 19. 2024

3화) 청송가는 길

"너 아무래도 하루이틀 휴가내고 아빠랑 청송에 좀 다녀와야겠다."




여름방학 후 다음 해 겨울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급성 폐렴이었다. 2학년 새학기가 시작하기 일주일 전이었다. 할머니가 대구까지 앰뷸런스로 이송되어 응급실에 들어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가족은 부랴부랴 대구로 내려갔지만 응급실에 들어간 지 일주일만에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네 명의 고모들, 그리고 엄마까지 번갈아가며 스물네시간 병원에서 간호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할머니 간병을 위해서 내려갔던 그 길로 우리는 곧장 청송으로 돌아가 할머니의 장례를 준비했다. 


여덟살의 나는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직계 가족이라는 의미를 담은 거친 베옷을 입은 채 나는 사촌들과 동네 아이들과 함께 할머니의 장례 기간 내내 신나게 마을을 쏘다녔다. 얼음이 꽁꽁 언 마을 앞 개울을 따라 산기슰까지 탐험을 한다거나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있던 이름 모를 이의 무덤에서 포대자루를 깔고 썰매를 타거나 하는 식이었다. 아직 눈발이 흩날리던 산골짜기를 타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호랑이를 잡겠다며 탐험을 하기도 했다. 하루해가 짧았다. 사촌들이 모두 합세한 겨울탐험은 장례의 무거움을 상쇄할만큼 신이 나는 그것이었다. 종일 바깥에서 뛰어놀다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엄마가 잠깐 손을 쉬고 대문 밖으로 나올라치면 나는 두 볼이 발갛게 상기된 채로 엄마에게 뛰어갔다. 엄마는 노느라 흐트러진 베옷의 앞섶을 여미어주며 추위에 붉게 물든 내 볼을 두 손으로 덥혀주었다. 


추운 아침 사촌들과 집앞 논에서 놀고 있는데 동네 남자어른들이 한두명씩 우리가 있는 논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손에는 커다란 망치와 도끼를 한 자루씩 쥐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다른 어른들이 집채만한 돼지를 끌고왔다. 돼지는 뒤로 보이는 산 만큼이나 거대했다. 돼지는 끌려 오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돼지를 끌고 오기 위해 어른들은 코에 커다란 못으로 코뚜레를 만들어 끼운 모양이었다. 코뚜레로 뚫린 구멍에서는 빨간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조용한 산 속 동네마을이 돼지의 울음소리로 가득찼다. 앞과 뒤를 막고있는 산들에 울음소리가 울려 공명했다. 죽음을 예감한 동물이 내지르는 소름끼치는 비명에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겁에 질려 조금씩 뒷걸음을 쳤다.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처절하게 바뀌었다. 코로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로 온갖 적의를 담은 차가운 공기가 고통스럽게 떠밀려 들어왔다. 때마침 돼지의 비명소리를 들은 엄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집 밖으로 나왔다. 나는 엄마에게 달려가 치마에 매달렸다. 사촌들과 동네 아이들도 각자 자기 엄마에게로 달려가거나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엄마 왜 돼지가 여기 와 있어?"


실제로 돼지를 본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응, 할머니 장례 때문에 돼지를 이제 마을 어른들이 잡아야 하거든."


엄마 치마에 매달려 돌아본 돼지는 마을의 뒷산만큼 컸다. 저렇게 거대한 동물을 사람이 잡을 수 있다고? 


내 눈에 담긴 공포를 엄마는 읽은 것일까. 


"너는 안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제 집에 들어가자."


엄마는 내 얼굴을 치마로 가린채 그대로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부산하게 장례 준비를 하던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을 뒤로 하고 나는 아랫방에 들어와서 앉았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사촌들이 옹기종이 모여있었다.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무릎을 모으고 동그랗게 팔로 온 몸을 감싸고 있었다. 나도 무릎을 모으고 동그랗게 몸을 최대한 움츠렸다. 몸을 최대한 안아서 위험한 공기로부터 나를 보호해야만 할 것 같았다. 우리 모두는 조용히, 난생 처음 본 거대한, 뽀얀 분홍 피부를 가진 돼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돼지의 비명소리가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뽀얗고 하얀 돼지의 코에서 줄줄 흐르던 새빨간 피가 눈 앞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순간 퍽,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믿을 수 없는 절규가 바깥에서 들렸다. 마치 무언가 절구 공이같은 것으로 단단한 진흙벽을 내려치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였다. 그 소리에 이어 아까 들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돼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고막이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내가 앉아있던 아랫방의 서까래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온 마을이 돼지의 비명소리에 몸서리를 쳤다. 뒷산조차도 진저리를 내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나도, 함께 방 아랫목에 모여있던 우리는 용수철처럼 다시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각자의 엄마를 비명을 지르듯 찾았다. 


"엄마-!"


귀를 막으며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듯 엄마를 찾았다. 어디선가 엄마가 급하게 달려나와 내 귀를 막으며 엄마의 치마섶에 나를 감추었다. 그러나 아무리 귀를 막아도 돼지의 비명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끈질기게 내 고막을 휘어잡고 집요하게 틈을 파고들었다. 온 세상이 집채만한 돼지의 비명소리에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누군가가 돼지를 죽이고 있었다. 돼지의 비명은 죽어가는 과정을 상세하게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 난생 처음 들어본 죽어가는 생명의 처절한 비명소리에 내 모든 감각은 마비되었고, 몸의 모든 피가 머리로 몰려들었다. 죽어가는 생명 앞에서, 처절하게 살고 싶어 내지르는 비명 앞에서 나는 어떻게야 할 지를 알 수 없었다. 그저 부들부들 떨며 온 힘을 다해 더 꽉 귀를 틀어막을 뿐이었다.


영원같은 긴 시간이 지난 후에야 마침내 돼지는 비명을 지르기를 멈추었다. 돼지의 소리가 잦아들자 엄마도 그제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아플 정도로 꽉 눌렀던 귀에서 손을 떼고 다시 평화를 찾은 마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더이상 돼지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고, 다시 마을은 일상의 웅성거림으로 되돌아갔다. 대문 앞에 서서 돼지가 있던 논 쪽을 살펴보았다. 아버지를 포함해 마을의 모든 남자어른들이 죽어 넘어져 있는 돼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낫과 거대한 망치가 들려져 있었고, 그들 틈으로 보이는 돼지의 이마에는 아까는 없었던 큰 혹이 불룩 솟아있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밀가루 반죽으로 거대한 혹을 만들어 붙인 것처럼 이마가 솟아 있다. 누군가가 거대한 망치로 돼지의 이마를 내려친 것이 분명했다. 그때 아버지가 나를 발견하고는 엄한 얼굴로 "동빈이 너 얼른 들어 가!"라고 소리쳤고, 나는 그대로 다시 온 힘을 다해 달려들어가 다시 엄마의 품에 안겼다. 


난생 처음 본, 살아있는 존재를 죽이는 의례 앞에서, 나는 죽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 지 잘 몰랐다. 죽은 것은 할머니인데, 어째서 돼지도 죽임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 


"엄마, 저 돼지 우리 할머니 같아. 우리 할머니도 저렇게 죽은거야?’


엄마는 황당하다는 듯 엄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 소리하는 거 아니야!”라고 화를 냈다. 어린 내 생각에도 이마에 망치를 맞으며 죽은 돼지와 우리 할머니 사이에 연관성은 없어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돼지의 얼굴에서 할머니를 보았다.. 죽음이라는 냉혹함 앞에 결국 할머니도 돼지도 같은 결말을 맞았다는, 당시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유한성에 대한 인식이지 않았을까. 논바닥에 죽어 엎어져있는 돼지는 처연했고, 이마의 혹은 잔인했다.같은 죽음인데 돼지의 것은 존엄성조차 없다는 것이 불러일으키는, 여덟살 어린아이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지 않았을까. 


나는 그 날 밤 밤새 돼지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악몽을 꾸었다.




그렇게 삼일장을 치른 후 할머니는 동네사람들이 종이꽃으로 장식한 꽃가마를 타고 선산에 묻혔다. 색색의 종이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상여는 할머니를 실은 채 이십여분을 걸어 선산에 도착했다. 살을 에이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꽃상여의 뒤를 따라 걸었다. 유난히 추운 3월이었다. 운동화 밑창으로 파고드는 땅의 한기에 발이 시려웠다. 할머니의 꽃가마는 너무 예뻐서 그걸 타고 할머니는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신다고 생각했다. 나도 나중에 저런 걸 탈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철없이 좋아했던 것도 같다. 아직 겨울 동장군이 머무르고 있는 산골의 땅은 너무 단단해서 마을어른들은 땅을 파는데 애를 먹었다. 뿌리가 관을 파고드는 아카시아 나무가 근처에 없고 햇볕이 잘 들고 앞에는 개울이 흐르는 자리라 명당이라고도 했다. 나중에 할아버지도 돌아가시면 함께 묻힐 자리라고도 했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묘자리의 끄트머리에 앉아 앞산을 보며 술을 기울이셨다.


꽃상여에서 작디 작은 할머니의 관을 내려 구덩이에 넣고 아버지는 베로 만든 관모를 쓴 채 마을사람들과 함께 삽을 들어 흙으로 덮기 시작했다. 한겨울인데도 삽질을 하는 남자어른들의 코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무덤 만드는 과정에 여자어른들은 술을 따뜻하게 덥혀서 남자어른들에게 들이키게 하고, 아이들은 모아서 다시 집으로 데려왔다. 할머니와 아버지를 선산에 남겨둔 채 나는 어머니와 집에 돌아왔다. 


그 날 밤 장례가 끝난 후 거짓말처럼 사람들이 썰물처럼 우리집에서 빠져나갔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가족들 뿐만 아니라 온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장례 준비를 도우며 오히려 장례가 아닌 잔칫날 같았던 우리집은 거짓말처럼 적막해졌다. 산에서 장작을 패 와 불을 지펴 저녁을 준비하던 부산한  아궁이는 이제서야 장례를 치르는 듯 무겁게 침묵했다. 할머니가 없는 할머니집은 이공간으로 빠진 암흑의 공간같았다. 숨쉬는 공기마저 무겁다는 건 이런 것 뜻하는 거구나. 고모들과, 사촌들과 우리 가족은 할머니가 없는 부재가 주는 공간의 뒤틀림을 참을 수 없어 여기저기 부산하게 집과 마당을 닦고 청소한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았던 주란이가 어느새 마당 구석에 서서 우리를 보고있다. 아궁이에서 밥을 앉히자 밥냄새가 주란의 집까지 퍼졌던 모양이다. 주란이는 귀신같이 밥 때를 알고 우리집에 찾아왔다. 구석에 서서 기름진 것 같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우리를 보고있다. 겨울인데도 여전히 같은 더러운 청록색 옷을, 자기 몸보다 작은 그 옷을 입고 있다. 추위에 빨갛게 튼 주란의 동그란 뺨은 욕망에 가득 차 있다. 자기 엄마의 야비해 보이는 미소가 이제보니 주란의 것과 닮아있다. 숙모의 미소가 싫었던 까닭은 주란의 욕망으로 가득한 야비한 미소와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무어라 형언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눈에, 뺨에, 미소에 가득한 욕망이 싫었다. 


"너네 집에 가!"


마당을 청소하던 어른들이 놀랄 정도로 나는 소리를 질렀다.  주란은 대꾸없이 벽에 조금 더 몸을 붙히며 여전히 야비한 웃음을 띠고 있을 뿐이다. 나는 마당 구석으로 달려가 평소 할머니가 마당을 쓸 때 사용하던 빗자루를 꺼내서 달려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주란에게 던졌다. 주란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난다. 기겁을 하며 달려나온 엄마는 곧 나를 제지하고 꾸짖으며 아랫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너 주란이한테 왜 그래? 왜 그렇게 못됐게 굴어?"


엄마는 당황과 분노가 섞인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언성을 높였다.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쟤가 싫어!"


그 날 한참을 그렇게 대성통곡을 했던 것 같다. 한참을 엉엉거리며 주저앉아 울었다.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는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있는 엄마의 눈이 아직도 생각난다. 한참 후 엄마와 함께 마당으로 나왔을 때 주란은 어디론가 사라져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우리 가족은 서울로 돌아왔다.






"네, 아빠 모시고 다녀올게요."


나는 월차를 내고 아버지가 운전하는 조수석에 앉아 청송으로 출발했다. 공원에서 처음 유령을 만났 날의 야근으로 급한 일은 모두 마친 터라 약간의 휴가 정도는 사용할 수 있기도 했다. 엄마는 미리 약속된 일정이 있어서 청송에 가질 못하는 상황이었고, 서울에서 청송까지 먼 길을 아버지 혼자 보내기에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내가 따라가기를 원했다.  오랫동안 청송에 가지 않은 내가 오랜만에 가서 마을사람들을 만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셨을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의 장례 이후 시골에 몇번 내려가지 않은 탓에 나는 청송과의 인연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아빠와 함께 청송으로 향하며 나는 오랜만에 시골집을 방문한다는 사실에 예상치 못하게 흥분되는 것을 느꼈다.


대식이 삼촌과 숙모는 아직 그 집에 살고 있다고 했다. 주란을 묻을 땅이 없는 그들은 영식이 오빠네 할머니를 통해 혹시 우리 선산에 주란을 묻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를 원했고, 아버지는 기꺼이 주란을 묻을 수 있는 땅 한마지기를 그 집에 양도하기를 원하셨다. 새삼 나는 대식이 삼촌과 아버지가 한 동네서 함께 자란 사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딸을 잃은 친구에게 아빠는 마음 편히 자식을 묻을 수 있는 공간을 내어주시길 원했던 것이다. 


어릴적 청송가는 길은 고역이었다. 몇 개의 재를 넘어야했고, 마지막 청송 읍내에서 할머니집이 있는 마을로 들어가는 길은 포장도 되지 않은 자갈길이었다. 아빠의 승용차는 느림보 같은 속도로 비포장도로를 기다시피 달려야 했다. 그렇게 느리게 가도 툭하면 내 주먹보다 큰 거친 자갈이 튀어올라 자동차를 긁기 일쑤였다. 아침 일찍 출발해도 굽이치는 재를 넘고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나면 할머니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매번 매우 늦은 저녁이었다. 게다가 청송에 갈 때마다 나는 멀미를 하기 일쑤였다. 재를 넘다말고 차를 멈춰세우고 몇번의 구토를 하고 나서야 간신히 할머니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멀미가 심했던 나는 청송가는 길에 만나곤했던 가장 큰 재의 이름인 문경새재라는 단어를 어릴적 제일 싫어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청송가는 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굽이굽이 돌아가야 했던 높은 산들은 모두 고속도로가 뚫려 있었고, 이제는 재를 넘을 필요없이 뚫려있는 터널을 통과하면 그만이었다. 멀미가 나게 하던 굽이치는 도로가 아닌 시원하게 포장된 고속도로를 달리니 온종일이 걸리던 서울에서 청송가는 길은 이제 한나절로 크게 짧아져 있었다. 심지어 읍내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30분 거리도 모두 포장공사가 되어 있어서 나는 청송을 아우르는 큰 산들의 경치를 구경하며 한나절 만에 할머니 동네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내가 떠나있던 사이 청송은 서울에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일년 후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살아생전 살갑지 않은 두 분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수도 있겠다. 평생을 해로한 반려를 잃는 것은 할아버지에게 큰 슬픔이었던 걸까.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이유없이 앓던 할아버지는 일년만에 할머니의 뒤를 따르셨다. 두 분이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곧 시골집을 정리했다. 윗마을에 살던 대고모에게 집을 파셨는데, 지금은 그 집에 대고모의 아들 내외가 산다고 했다. 우리는 그 집에 머물기로 했다.


아버지와 나는 할머니 마을로 들어가기 전 청송 읍내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청송 읍내에서도 30분은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가야 우리 동네가 나온다. 하루에 오전과 오후 2번만 버스가 운행되는, 그런 깊은 오지였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제는 포장이 되어 한결 편안한 길을 타고 들어가며 나는 길을 에워싼 험한 산세에 다시 한번 놀란다. 이토록 깊고 험한 곳이 내 뿌리가 시작된 곳이라니. 괜히 구치소가 여기 들어온 것이 아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여덟살의 눈으로 바라보던 것들을 성인이 되어 다시 보니 모든 것이 작아져있었다. 강이라 생각했던 것은 실상은 작은 개울이었고, 큰 다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버스 한 대가 빼곡히 지나가야 하는 부실해보이기 짝이 없는 허름한 다리였다. 몇시간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대로는 사실은 자동차로 오분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다. 이십년 만에 다시 만난 청송은 작아져 있었다. 그렇게 30분을 달려 우리는 마침내 옛날 할머니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도 작아져 있었다. 버스가 다니는 길에서 할머니 집까지 여덟살이 내달려도 한참을 걸리던 길이었는데 내 성인걸음으로는 세발짝이면 할머니 집에 닿을 듯 했다. 이토록 작은 마을이었나?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마을 전경을 둘러보며 눈을 깜박인다.


아버지는 마을 한가운데 있는 고목 아래 차를 주차하시곤 우선 지금은 대고모의 아들이 살고있는, 아버지가 나고 자란 집으로 향했다. 더운 여름볕 밑을 잠깐 걸어 할머니 집에 도착했다. 어릴적 할머니 담벼락에는 나팔꽃이 자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수국이 한창이다. 마당 안에서 수국이 타고 넘어와 담벼락에 쏟아질 듯이 걸쳐있었다. 새 주인은 집을 잘 관리한 듯이 보였다. 예전 낡은 옛날집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깔끔한 이층 양옥집이 들어서있다. 마당에서 펌프를 사용해서 물을 길어올리던 우물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작은 야외용 의자가 보인다. 담 너머에서 안쪽을 바라보며 우리는 한참을 서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마당에서 할머니의 뒷모습을 찾는다. 바쁘게 뛰어다니던 내 모습을 쫓는다.


그 때 대고모의 아들 경식이 삼촌이 문을 열고 나왔다. 


"아이고, 형님 오셨니껴"


삼촌은 얼른 달려나와 허리까지 밖에 오지 않는 낮은 철제대문을 열어준다. 시골집은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가. 경식이 삼촌은 할아버지의 남매였던 고모의 아들이니 정확히는 촌수가 더 멀지만, 시골에서는 촌수를 따지기 힘든 모든 사람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그 또한 돌림자인 '식'자를 쓰고 있다. 삼촌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줬다.


"형님 진짜 오랜만이네요."


아버지와 삼촌은 반갑게 악수를 나눈다. 생각해보면 그 시골에서 서울로 나와 살고있는 건 우리 가족 뿐이었다.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삼촌들이 나고 자란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혹은 읍내에서 일하며 살고 있다. 어릴적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아버지를 위해 가난한 농부였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논과 밭과 소를 팔아 아버지의 학비를 마련했다. 외아들 이후로 줄줄이 낳은 네 딸들은 아들을 위해 희생할 수 밖에 없었고, 고모들도 영리했지만 아무도 대학을 진학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이 외진 마을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 세대의 첫번째 대학 진학자였고, 외지에 살고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아버지를 이 마을에서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니가 동빈이재?" 아이고 몬알아보겠다."


할아버지 장례에서 본 이후 처음 보는 나를 알아볼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하지만 그저 웃으며 "안녕하세요 삼촌'이라고 대답을 건넨다. 몇 마디의 덕담을 주고받은 후 삼촌은 인상을 찌푸리며 아버지에게 다시 말을 건넨다.


"지금 마을이 초상이 났습니데이.. 주란이 고 녀석 때문에. 마을 당나무에 목을 메 가지고 아침에 읍내로 출근하고 핵교가는 애들이 버스 탈라고 나와서 주란이 매달린 거를 봤지 않겠습니까."


당나무라면 우리가 방금 차를 세운 마을회관 앞에 있는 큰 나무이다. 어릴적 효정과 내가 타고올라 마을을 내려다보던 거대한 고목. 하루에 두번 들어오는 버스는 아침에 당나무 앞에 정차해서 사람을 실고 읍내로 나가고 저녁에는 돌아오는 사람들을 당나무 앞에 내려준다. 마을에 대소사를 결정할 땐 그 앞에서 마을회의를 하곤 했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어릴적 얼굴을 그대로 간직한 주란이 바람에 흩날리듯 고목에 달린 모습을 상상했다. 


"어떡하다 그런 일이 이 마을에서 났는지 모를 일입니데이."


삼촌의 말에 생경함을 느낀다. 주란을 걱정하는 걸까, 마을을 걱정하는 걸까.


삼촌은 얼른 우리를 불러 들이며 지금은 대구에 나가 살고있는 자녀들이 쓰던 방을 우리에게 내어주었다. 새로 지은 2층 양옥집의 2층에 올라가서 바깥을 내다보니 할머니 집의 마당이 더욱 작아 보인다. 왼쪽으로 대식이 삼촌의 집이, 오른쪽으로는 현식이 삼촌의 집이 언뜻 보인다. 나는 경식이 삼촌의 딸이 쓰던 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작은 학생용 침대에 걸터앉으며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짐을 정리해두고 거실로 내려오니 아버지는 벌써 삼촌과 소파에 앉아 이야기 중이었다. 우리가 올라간 사이 삼촌이 대식이 삼촌집에 가 보았으나 집은 비어있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나는 오늘은 쉬고 내일 대식이 삼촌을 만나보기로 했다. 




이전 02화 분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