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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Jul 26. 2021

인생에서 길을 잃었을 때


  이맘때면 연락이 와야 했다. 언니, 나 물어볼 거 있어. 언니, 봉사활동 자기소개서 쓰려고 하는데 도와주면 안 될까? 그러면 나는 "지금 바빠, 나중에."라는 답장을 남겨두고 과제로 눈을 돌렸을 텐데 올여름은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걔는 세상을 떠났구나. 방학을 맞아 대외활동을 하겠던 결심을,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며 이제 제대로 살아보겠다던 동생의 다짐을 더는 만날 수 없었다.


  흔히 슬픔은 인연을 떠나보낸 시점으로부터 시간이 흐를수록 흩어진다고들 한다. 그러니 나도 시간의 힘을 믿고 꼬박 반년을 바쁘게 지냈다. 문득문득 가슴이 조여 오더라도 언젠가 저 세상에서 만나게 될 테니 굳이 커다란 신경을 쓰지 말자는 일념으로 하루에 네 시간을 자고 나머지에는 일을 했다. 계속 이렇게 지내다간 번아웃이 오리라는 사실도 지나간 과거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조그만 일이라도 온 힘을 다해 몰입하지 않으면 나는 또 사후세계를 기웃대면서 몸에서 빠져나가겠다고 유체이탈하는 법을 찾을지 모른다. 그런데 이번에는 헤어진 시간과 기억이 지워지는 속도가 비례하지 않았다. 이유를 고민했다. 친구와 갈라설 때는 불쑥불쑥 떠오르는 기억에 아프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이토록 아파야 하나. 곧 답이 나왔다. 서로에게 하나씩 안겨 있던 추억이 일방적으로 한 명에게 옮겨가서가 아니려나. 그때 우리 그랬잖아, 라는 말을 더는 함께 할 사람이 없어서.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추억을 경험한 이가 아니니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하는 일에서 머물 뿐 말없이 함께 웃음을 보이며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는 건 불가능하다.


  세상을 직접 끊어낸 사람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봤으니 세상의 모든 일이 부질없었다. 심지어는 밥을 먹는 일조차 무의미했다. 친구와 연락하며 사소한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는 일도 잠깐일 뿐 다시 무료해졌고 재밌다는 영상을 봐도 짜증만 났다. 심지어는 기껏 직장에 와놓고 까르르 웃으며 쓸데없는 얘기만 하는 상사들이 한심했다. 그러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목표를 향해 달리는 사람들이 부럽다기보다 신기했다.


  인생의 결론을 죽음이나 소멸로 해석하니 현실 세계의 모든 가치들이 다 발아래로 향했다. 손을 잡고 거니는 사람들도 저마다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하면 각자 누워 다닥다닥 붙은 납골당으로 들어가야 하지 않나 하는 불만까지 들자 더는 내가 내 힘으로 나를 구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건 마치 전공을 택하거나 직무를 고를 때와는 다른 결의 혼란이었다. 완벽히 길을 잃은 기분. 아무리 재밌다는 걸 직접 해도 무덤덤했고, 아무리 맛있다는 걸 기다려 먹어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많이 자느라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고독사를 검색했다. 방구석에 자기소개서가 쌓인 채로 눈을 감은 취업 준비생 분과 온 방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끝내고자 시도한 혈흔을 보며 인생의 덧없음을 배웠다.


  그래도 지금 이 글을 쓰고 계시다는 건 무기력에서 빠져나오셨다는 걸까요? 라는 질문을 받을 수 있겠지만, 아직 그 굴레에서 완벽히 도망치지 못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당최 잡히지 않고, 어떻게 기껏 목표를 잡는대도 얼마나 갈지 모르겠다. 모르는 순간에는 차라리 모르겠다고 얘기하는 게 홀가분하다. 몰라, 몰라,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못난 사람의 눈치를 피하며 스스로를 갉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나를 괴롭히던 직장에 사직서를 쓰고 나왔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가끔 이성을 차릴 때면, 일상을 깨뜨린 주범을 꼬집기보다 깨진 일상 위에서 발이 다치지 않게끔 걸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고민한다.



  상황을 바꾸는 것이 더는 불가능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한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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