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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요아 Aug 09. 2023

회피성 여행이 되지 않도록

내가 너무 싫은 날에


Prologue.



  내게 있어 코타키나발루와 교토와 치앙마이와 런던의 공통점을 꼽는다면, 길이길이 추억에 남을 즐거운 여행을 한 나머지 집에 돌아오자 파도처럼 밀려오는 헛헛함을 느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나는 언제나 여행을 일상의 환기처로 여겼지만 실상 내 여행은 회피성에 가까웠다. 냉장고에 묵힌 음식물을 내다 버리기 귀찮아서, 화장실 구석에 뭉쳐진 머리카락을 치우기 번거로워서, 매일 아침 출근과 퇴근에 시간을 쓰는 게 아까워서, 비슷한 일을 하는 다른 사람들이 존경스럽고 대단해 보여서 먼 곳으로 비행기를 끊고 떠났다.


  잔고 사정에 맞지 않게 돈을 몽땅 써서 떠난 여행이기에 계획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어떻게 운이 좋아 괜찮은 여행을 했을지라도 비행기와 기차를 타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반기는 건 여전히 작은 나의 방이었다. 할 일을 제쳐둔 뒤 여행을 떠났으니 일감도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사실이 문득 지긋지긋해 이번에는 잠으로 도피했다. 언제든 도망갈 곳이 생겨났으나 그만큼 돌아와야 할 곳이 나를 기다렸다. 종종 타인이 되고 싶은 바람이 솟았으나 결국 나는 내게로 돌아와야 했다.


  처음 연재 제안을 받았을 때, 나를 싫어하게 만드는 것들의 목록만을 쓰려고 했다. 꿀꿀한 날씨를 닮아 기분 역시 습해지는 점과 회사에서 나의 몫이 불분명해 무능력하게 느껴진다는 이야기와 급격하게 늘어난 체중과 잠을 너무 못 잤거나 혹은 너무 많이 자서 내가 싫어지는 느낌에 대해서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려 했다. 나는 나를 좋아하는 날보다 싫어하는 날이 월등히 많아서 언제고 내가 왜 나를 미워하고 탐탁지 않게 여기는지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적으면 모두가 저 멀리 숨겨놓은 그 감정을 꺼내 펼쳐놓음으로써 공감을 받겠다고 확신했다.


  백 가지 정도는 거뜬히 적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과 다르게, 연필을 잡은 손에 점점 힘이 빠졌다. 내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라는 제목 아래 적힌 목록은 정확히 열두 가지뿐이었고, 그 열두 가지의 목록을 쳇바퀴 돌며 나를 싫어한다는 정보를 알고 나서는 관점을 바꿨다. 스스로가 싫었을 때마다 어떻게 그 감정을 빠져나왔는지, 또는 그 감정을 그대로 인정하고 안아주기 위해 어떻게 애썼는지도 적어보고 싶어졌다.


  나를 좋아하기 위해 행동하는 무엇들에 대해서는 스무 가지가 나왔다. 나는 나를 싫어하는 만큼이나 좋아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직전 책에 적은, 좋아하는 향의 바디 워시를 구비해 두고 무기력한 날에 꼼꼼하게 그 향으로 샤워하는 일도 데려왔고 공기정화식물에 이름을 붙여 알뜰하게 키우거나 자전거로 라이딩하는 즐거움부터 서평을 쓰고 좋아하는 작가님을 태그해 잘 읽었다고 간접적으로 편지를 보내거나 사지 않더라도 장바구니에 인테리어 소품을 담아두는 즐거움도 빠짐없이 챙겼다. 한 번 기분이 좋아도 쉽게 가라앉는 성격을 가진 내게 그 즐거움을 길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는 나만의 작은 습관도 잊어버리지 않으려 적어두었다.


  흔히 우리는 힘든 일이나 괴로운 걱정이 생겼을 때 그 일들을 일기에 써보라는 조언을 받는다. 생각으로는 부풀던 걱정이 연필을 잡고 종이 위에 놓였을 때는 조금은 작아 보이므로.


  나는 아침부터, 혹은 어느 밤이나 새벽부터 나를 싫어하는 위기에 놓이지만 내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적음으로서 조금은 해방될 수 있었다. 그건 감정의 근원지를 파악하는 일과 비슷했다. 요즘 끼니를 배달 음식으로만 먹어서 내가 싫어졌다면 반 정도는 덜어내는 것으로 해결책을 잡으면 됐고, 내 미래는 천천히 하강선을 그려 어딘가로 사라질 것 같다는 마음이 들면 솟구치는 그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에만 집중하면 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내가 싫어질 때마다 무더운 여름날임에도 빨래방에 들러 막 마친 뽀송한 이불을 들고 집으로 향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이불은 두툼하니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 경쾌했던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청소기를 한 번 돌려 머리카락을 빨아들이는 것만으로, 커피를 사기보다 직접 얼음을 띄워 내리는 것만으로 자연스레 일상에 발을 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대로 지내면 어느 날 여행을 떠나도 그 여행은 회피성 여행이 아닐지 모르겠다는 확신이 일었다.


  그러나 이토록 즐거운 미래를 그려도 오늘 밤이면 나는,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나는 또 내가 싫어질지 모른다. 한없이 낮아진 자존감에 어젯밤 했던 농담이 부끄럽고 퇴근 후 기진맥진해진 몸을 이끌고 침대에 풀썩 쓰러지며 퇴근했는데도 회사 일을 곱씹으며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비명을 지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나는 방어막처럼, 한 게임에서 나오는 특수 방패처럼 나를 지키는 소소한 습관들을 품에 안고 있다. 그 방어막은 마음과 몸의 체력을 높이는 물약이 되어 외부와 내부의 스트레스로부터 나를 지켜준다. 나는 그제보다 어제, 어제보다 오늘 조금씩 나를 미워하지만 반대로는 소소한 일상의 습관으로부터 나를 지킨 덕분에 재빠르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상담 선생님은 한 시간의 상담이 끝날 때쯤 이런 말을 전하곤 했다.


  "둥둥 떠다니지 말고, 현실이라는 제 자리로 돌아와요."


  제 자리, 나는 제 자리를 반질반질하게 닦는다. 이윽고 내년 여름 떠날 비행기표를 알아본다. 돌아왔을 때 조금의 허무함이 들지 않도록 내 자리를 잘 관리해 두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 자리는 내가 오랫동안 머물 자리다.


프롤로그부터 10화까지는 전문을 읽으실 수 있지만, 11화부터 에필로그까지는 '내가 싫은 이유'만 공개됩니다. '나를 좋아하도록 만드는 방법'은 책에 쓰여 있어요. 또, 연재물에는 없는 소소하고 세심한 에피소드는 책에서만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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