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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예지 Jul 10. 2019

매일 아침 커피 내리는 남자

눈곱을 떼며 원두를 갈던 그 남자

띵동. 출근하자마자 메신저가 울렸다. 모닝커피를 마시러 가자는 대리님. 난 정중히 사양했다. 왜냐하면 이미 커피를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탕비실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는 내 손에 들린 텀블러를 보며 한 마디 건넨다.


"오늘도 텀블러 있는 거 보니, 커피 내려왔나 보네?

"네. 커피 향 정말 좋죠?


그는 오늘도 나를 위해 커피를 내렸다.


전날 폭음을 했더라도 그는 출근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눈을 뜬다. 문을 열고 주방 옆에 있는 커피 머신 앞에 있는 원두 봉투를 열어 놓는다. 커피 그라인더 안에 큰 손으로 원두를 한 움큼을 넣는다. 주문을 외우는 건지 계속 중얼대며 원두를 갈아 내린다. 곱게 분쇄된 원두 가루가 한 방울 두 방울 커피로 변신하는 데까지 십 오분의 시간이 걸린다.


그는 내가 일 년 동안 아침에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까지 그 행동 그대로를 반복했다. 씻고 나오면 그와 나는 한 식탁에 앉는다. 어제저녁에 미처 나누지 못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출근 시간이 늦어버리기 일쑤다. 우리의 모습을 보던 엄마는 말한다.


원두를 갈고 커피를 내려본 적 있는지. 생각보다 무척 귀찮은 일이다.


"딸이나, 아빠나, 둘 다 그러다가 출근 늦겠다.


그렇다. 매일 아침 커피 내리는 남자는 우리 아빠다. 희대의 로멘티스트라 불리는 남자. 아빠가 커피를 내리게 된 계기는 딸의 한 마디로 시작됐다. 모든 고민거리를 아빠에게 털어놓는 딸은 오늘도 또 아빠를 붙잡고 한탄하기 시작한다.


"하루에 커피 세 잔을 마시는데, 돈이 만만치 않아.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딸?

"세 잔 가지고도 충분하지가 않아. 머리가 안 돌아가서 커피에 자꾸 의존하게 되는 거 같아.


건강에 좋지 않다며 커피를 줄이라는 말 대신 아빠는 알았다고 말했다. 뭘 알았다는 건지 그 당시엔 잘 몰랐다. 말 대신 그는 행동하는 남자임을 증명했다. 매일 아침 나를 위해 텀블러에 향이 그득한 커피를 내리고 또 내렸다. 커피를 내리지 못한 날을 손에 꼽을 정도로 의무적으로 커피를 내렸다. 아주 긴 출장이 예고돼 있던 일주일 전. 커피를 내리며 그는 말했다.


"우리 딸 커피 내려줘야 하는데. 일주일 동안 할 일 없어졌네.

"아빠도 쉬고 좋지. 뭐.


괜히 딸 때문에 귀찮진 않을까 싶어 말을 아낀다. 커피 내려주는 아빠에게 쉽사리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돈을 더 벌면, 더 넉넉했더라면 아빠가 원두를 가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을 텐데. 표현이 서투른 딸은 아빠의 눈을 피해 말을 줄였다.


철부지 땐, 모든 딸들이 아빠와 결혼하겠다고 말한다. 청소년기가 되어 똑같은 질문을 하면 아빠 같은 사람과는 결혼하기 싫다고 말하는 그들의 인터뷰가 익숙하다. 그들과는 정반대로 이십 대가 되어도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우리 아빠는 로맨티시스트다. 정시에 퇴근해 가족들과 같이 밥을 먹는 게 익숙하고 주말마다 우리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던 그 덕분에 감사하게도 아빠라는 그림을 그릴 때 '우리 아빠'를 이상향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우리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커피를 내렸을까.


결혼 전 외삼촌은 내게 말했다.


"늬 아빠, 이제 커피 안 내린다고 서운해하시더라. 그냥 그렇다고.

"아빠가? 뭐라고 했는데?

"우리 딸, 커피 매일 내려줬는데 이제 못 내려주겠네. 하시더라고. 그리곤 말을 못 이으시더라.


처음엔 그에게 이게 그 정도로 큰 의미일까 생각했다가 결혼식날이 돼서야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매일 나와 모닝커피를 마시던 대리님은 아빠와 인사하며 연신 눈물을 훔쳤다. 그와 악수하며 손으로 전해지는 그의 따뜻함을 몸소 느꼈기 때문일까. 아빠는 그녀에게 '우리 딸 잘 부탁해요.'라며 우리 팀 팀장님에게 건네던 인사보다 더 감사함을 담아 그녀를 배웅했다.


이따금씩 떠오르던 그의 커피 맛이 그리운 건 다른 이유가 있다. 최근에 새로운 커피 머신이 집에 들어왔다. 집들이를 온 남편 친구가 준 선물이었다. 분명 집에 있는 커피 머신보다 최신이라 성능도 훨씬 좋은데 신 맛이 강하고 맛이 없다. 원두 탓인가 싶어 냄새를 맡아보지만 큰 차이가 없는 것도 같은데.


딱 한 가지가 빠졌다. 커피 그라인더로 원두를 갈며 그가 하던 의식이 빠졌다. 커피가 맛있어지길 바라던 그는 마음을 담아, '좋은 향아 더 퍼져라, 커피야 더 맛있어져라.'라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바리스타이자 주술사였던 우리 아빠는 내게 사랑의 대명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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